2024. 3. 5. 22:30ㆍ그날의 이야기
정묘호란으로 강화조약을 맺고 돌아간 후금. 그들은 명나라의 드넓은 땅도 어느정도 빼앗고, 국호도 '청'나라로 바꾸고 명실공시 동북아의 최강국이 되었다. 강화조약으로 '형제관계'를 맺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강대함을 드러내놓고 싶었는지 이번엔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정묘호란을 겪어본 터라 조선 조정에서는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청나라에 끝까지 대항하자는 '주전론'과 청나라를 이기기는 어려울 듯 하니 그들의 요구에 따르자는 '주화론'이 대립한다. 결국 '주전론'으로 의견이 잡히고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한다. 이에 결국 청나라의 홍타이지는 침략을 결정하고 드디어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병자년에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난이 일어났다 하여 '병자호란'이라 일컫는다.
조선 조정은 변란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이런 와중에 적군이 벌써 개성을 지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조정은 검찰사로 판윤 김경징, 부사로 이민구를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으로 주사대장을 겸직시켜 강화도를 수비토록 하였다. 하지만 청군은 침략한지 단 5일만에 한양을 점령한다. 역시 그들의 기마전술은 기가 막힐 노릇이였다. 또한 그들은 멈춰서 진을 치고 식사를 하는것이 아닌 휴대용 식량 습성인지라 기동력이 엄청났다. 조선은 이런 기마병의 특징을 잘 몰랐는데, 대체적으로 조선은 산성 중심의 방어전이라 의주나 백마, 황주산성을 거점으로 진을 치는 동안 청군은 그냥 직빵으로 한양으로 내달렸던 것이다. 조선수비병들은 그들이 지나갔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예전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던 인조는 적군으로 그 길마저 차단되어 잡힐 뻔 했다. 이때 최명길 장군이 그나마 맞서서 협상을 이끌어내며 시간을 끌었기에, 간신히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있었다. 1636년 12월 5일, 청나라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다. 성 안에는 간신히 1만명 정도가 50일 가량 버틸 수 있었다. 게다가 계절은 겨울이다. 적군은 수시로 대포를 쏴대었다. 성안의 분위기는 완전 아수라장이였다. 이런 와중 성안의 신하들은 또 두 파로 나뉘어 갈등이 시작된다.
'지키자! 할 수 있다!(척화파)' VS '화해하자! 답이없다!(주화파)'
이런 상황에서 어렵게 47일을 버티다가 결국 인조는 항복하는 문서를 써서 적진에 보낸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 나루 수항단에 오른다. '삼베구고두' !!!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하는 의식). 임금복장이 아닌 군사복장인 융복을 입고 인조는 홍타이지 앞에서 삼베구고두를 한다.
정축년.. 청나라와의 화약 조건은 다음과 같다.<정축화약>
1. 명나라의 고명과 책인을 청나라에 바칠 것.
2. 명나라와는 국교를 단절하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을 것.
3. 명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청나라 연호를 사용할 것.
4. 세자와 왕자, 대신의 자제들을 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5.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병을 파병할 것.
6. 청나라가 가도를 공격할 때 원병을 파병할 것.
7.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것.
8.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오면 즉시 돌려보낼 것.
9. 두 나라의 신하들의 통혼을 장려해 우의를 돈독히 할 것.
10. 성을 새로 쌓거나 개축하지 말 것.
11. 매년 세폐를 보낼 것.(세폐 : 사신이 가져가는 공물)
이에 더하여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찬양하는 '삼전도비(대청황제 공덕비)'라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
당시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간신히 고국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을 '환향녀'라 불렀다. 한편 끌려간 자들 중엔 왕자들도 있었는데, 명나라가 망하자 청나라가 그들을 풀어주고 그들 중 '소현세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에게 "이제 청나라와 대결의 시대가 아니라 우호와 협력의 시대여야 합니다. 내가 왕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가 인조에게 미움을 산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돌아온지 2달여만에 사망하는데, 그 원인이 독살임이 밝혀졌지만 범인은 추측만 난무하다. 어쨋든 삼베구고두를 겪은 인조에게는 청나라가 여전히 굴욕과 복수의 대상이였다. 인조는 두번 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효종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정책의 정책을 이어간다. 아울러 친청세력을 다 제거하고, 반청의 척화파들을 주로 등용하였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은 더이상 전쟁을 원치 않았다.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조선땅에서 조선이 누구편이 되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도 않았다. 효종의 스승이였던 우암 송시열도 그에게 북벌론보다는 내수의 안정을 권하였다. 어쨋든 효종은 군사를 강화하다가 재위 10년만에 눈을 감는다. 당시까지 종신들은 여전히 청나라를 무시했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대명의리)는 끝까지 지켰다. 어쨋든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론은 실패하고, 오히려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이 대두된다. 당시 조선이 청에 보낸 사신이 청의 신문물을 보고 조선에 돌아와서 이를 전하였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는 청과 조선의 국경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때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구분하였다. 이 문제는 훗날 간도문제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현종'이 왕위에 오른다. 이 당시엔 당쟁과 자연재해, 전염병이 심했다. <현종실록>에는 "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남방의 추위도 올 겨울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중략) 돌림병이 치열해 죽은자가 이미 67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라고 전라도 관찰사 오시수의 보고서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근에도 당쟁의 열기는 다시 달아오르고 신하들은 '예'를 둘러싸고 예송논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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