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4년)이괄의 난;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이괄. 왜 그가 왕따였는지... 이러니까 눈 돌아가지~

2024. 2. 29. 22:25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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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서인세력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당시 이괄은 한성부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평소 불만이 있던 자들보다 자신이 한 등급 아래인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는데 그치고, 아울러 자신의 아들과 동생은 논공행상에서 아예 제외되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후금의 침략이 불안한 터라 조정은 그를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하고 관서지방으로 파견하였다. 

1624년 이괄은 관서지방에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느닺없이 평소 정적이였던 문회*허통*이우 등이 자신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그러나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하였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한다. 안그래도 논공행상때부터 불만이 폭발할 지경인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당하고 급기야 자식놈마저 압송되어가니 눈이 돌아갈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이괄은 압송하러 온 자들을 죽이고, 항왜병 100을 선봉장으로 1만2000군사를 이끌로 도성으로 향한다. 

반군이 평양으로 진격하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고 반군 토벌에 나선다. 저탄에서 마주친 정규군과 반란군은 일대 격전을 벌였는데, 반군은 이를 돌파하고 개성을 거쳐 벽제까지 이르렀다. 이에 인조가 공주로 피란을 갔고, 반란군은 서울을 점령한다. 이괄은 선조의 열번째 아들인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지원을 받지는 못하였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안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데 이괄이 제시한 목표와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곧 이괄은 지원세력 없이 혼자 싸워나가는 꼴이 되었다. 결국 목표달성을 위한 충분한 군사력과 지원을 갖추지 못하였고, 이 틈을 파고들어 반격을 가해온 관군에게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때 반군 기익헌*이수백 등이 이괄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면서 난이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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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난 뒤, 서인들은 호위청 군관 수를 배로 늘리고 '어영청'과 '총융청'을 설치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또한 도성 부근에 피신처가 없기에 임금이 공주까지 피란간 것에 대해 느끼는 바가 컷던지 남한산성 축조를 신속하게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내부를 다스리기 위한 병력증강 및 군사력 정비가 이루어졌지만, 또 그만큼 외세에 대한 정비는 소홀하였기에 훗날 이런 상황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참고로, 이괄의 난을 진압할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당시 체찰부사였던 '이시발'이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청주에서 박춘무 휘하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하였다. 또 '이몽학의 난'을 토벌할 때도 큰 공을 세워 장악원장(정3품)으로 승진했다. 광해군 15년엔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묘소는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지전마을의 경주 이씨 묘역에 있다. 

이시발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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