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9. 22:08ㆍ그날의 이야기
'환국'이란 정국이 전환되었다는 의미로써, 그 목적은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여당)이 왕을 결정하고, 왕은 붕당 간 경쟁을 이용하여 대신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약화시키기도 하며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이였다. 곧 왕권이 강했기에 정치를 주도하고 사대부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 배경이랄 수 있다.
환국이 현종 때부터 시작되기 하였으나 피의 정치보복이 정점에 달했던 것은 숙종 때라고 할 수 있다. 숙종 때부터 정치적 격변이 여섯 번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네 개를 주요 환국이라 부른다. 연도 순서대로 경신환국(숙종 6년, 1680년)~기사환국(숙종 15년, 1689년)~갑술환국(숙종 20년, 1694년)~정미환국(영조 3년, 1727년) 이다.
1674년, 현종이 병으로 급사하자 당시 13세에 불과하던 숙종이 즉위하게 된다. 한편, 현종의 사촌동생이자 호국공인 은평대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복창군*복선군*복평군 3형제였다. 아직 어리고 병약한 아들 숙종이 즉위에 오르자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는 남인세력들이 병양한 아들 대신 은평대군쪽 아들들을 지지할까봐 늘 걱정이였다. 이에 명성왕후는 아버지 청풍부원군에게 저 3형제를 간통죄로 고발하라고 지시하였다. 내용은 복창군이 인선왕후의 초상 때 입궁하여 현종의 승은을 받은 궁녀인 김상업을 범해 임신시켰고, 복평군은 명성왕후가 왕비시절 당시 여종인 귀례를 희롱하다 강제로 범하고 임신시켰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모두 잘못이 없고 무고하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조정대신들도 왕실의 일이니 관여하지 않겠다고 발뺌할 정도였고, 형식적인 수사에서도 그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숙종은 평소 명서왕후와 외조부 김우명의 지나친 내정간섭에 시달려왔던 터라, 부왕이였던 현종이 지극히 아꼈던 복선군 형제에게 굳이 벌을 주고 싶지 않다며 하루만에 무죄판결로 사건을 종결시켜 버린다.
이제 무죄로 그 사건이 끝났다 했는데, 이를 계기로 남인세력인 윤휴와 허목은 상소를 올려 왕족을 모함한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무고죄와 반좌율로써 다스릴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또 현종 때부터 자행되어 온 청풍 김씨 일족(왕실 외척)의 세도행위 및 유사 수렴청정을 자행하며 국사에 함부로 관여해 온 명성왕후의 월권 행위에 대한 남인의 불만이 결국 폭발하는 계기가 된다. 이 외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생략하고, 어쨋든 이런 연유로 김우명은 딸 명성왕후 덕분에 처벌은 면하였으나 그로 인해 대대적인 망신을 당하여 조정에서 물러나 병을 핑계로 밖에 나오질 않고 누워지낸다. 이에 숙종과 대신들을 더욱 압박하는 명성왕후의 행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수치심과 분노를 견디지 못한 김우명은 낙향하여 술로 여생을 보내다가 홧병으로 사망하였다 한다. 삼복형제는 방면되었다.
예송논쟁에서 남인세력이 분파하여 청남파와 탁남파로 나뉜다. 청남파란 서인 송시열에 대하여 강한 처벌을 주장했던 강경파이며, 탁남파는 사형을 반대하는 온건파이다. 숙종이 등극할 때 청남파 윤휴는 57살이였다. 당시 청남파였던 윤휴와 탁남파인 허적이 북벌론을 강하게 주장했었고, 같은 파인 허목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탁남파 영수 허적은 내부 정적인 된 허목을 제거하게 되고, 그 후 정권을 독차지 한다. 그는 2차 예송논쟁 와중에 영의정이 되어 내각을 관찰했고, 다음해인 1675년에 도체찰사부가 설치되자 도체찰사를 겸임함으로써 군부마저 장악하며, 명실공히 당*정*군을 한 손에 쥔 일인재상이 된다.
1680년 3월(경신년), 남인세력 영수인 허적이 자신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받는 연시연 때 비가 내렸는데, 임금(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 하였는데 신하의 말로 벌써 허적이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유악은 군사물자로써 개인이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다. 만약 필요하다면 왕이 선처해서 빌려주는 형태를 취했는데, 당시 남인들은 허적의 권세를 믿고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가져간 것이였다. 이에 숙종은 노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허적의 집을 염탐하게 하였다. 살펴보니 남인들은 다 모였으나 서인들은 김만기*신여철 등 몇 사람 뿐이였다. 이에 숙종은 철원에 귀양갔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을 삼았고, 훈련대장을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체인지하고, 이어서 영의정엔 김수항, 좌의정에 정지화, 예조판서에는 여성제, 도승지에는 남구만, 대사헌에 이익상, 이조참판 자리에는 조사석을 각각 임명하였다. 한마디로 조정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꿔버렸다. 역시 ~ 숙종의 카리스마!
다음달인 4월. 정원로의 고변이 있었다.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이 되는 복창군*복선군*복평군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해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내용인 즉,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선 몸이 약하고 형제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만일 그때 서인들이 임성군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 병력으로 뒷받침 하겠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복창군*복선군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고,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악자를 엄호했다 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의 시대가 열린다. 이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들이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나, 머지않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의 붕당이 시작된다. 그 중 권력의 중심을 잡은 쪽은 송시열과 삼척(왕실외척으로 김석주*김만기*민정중) 연합 세력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