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9년)기사환국;숙종♡장옥정.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실권을 잡은 사건. 숙종의 카리스마! 인현왕후, 장희빈(장옥정), 송시열, 김만

2024. 3. 14. 22:31그날의 이야기

반응형

숙종의 단 하나의 사랑 ~ '장희빈'

 
1680년 경신환국 후 서인세력이 집권한다. 숙종이 등극하고 6년만에 경신환국으로 남인세력이 몰락하고 서인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 숙종이 남인출신의 궁인 장씨(희빈 장씨)를 총애하자 어머니 명성왕후가 이를 경계하여 1680년 장씨를 궁궐밖으로 내쫓았다. 그로부터 1년 후 1681년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사망하고 이에 명성왕후와 송시열의 추천으로 인현왕후(여흥 민씨)가 왕비로 선출되는데 가례 초기부터 숙종은 애정은 커녕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청나라 4대황제 강희제-오삼계난 진압을 계기로 반청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다.

당시 국제정세로는 중국에서 오삼계의 난이 일어났는데 청이 난을 진압하였고, 중국국내의 반청세력이 일소되어 강희제에 의한 군주독재가 이루어진다. 청의 '오삼계의 난' 진압 이후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잠잠해졌다. 1683년 숙종이 기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었다. 평소 무속신앙을 신봉했던 명성왕후는 아들 숙종을 살려내겠다는 의지로 무당의 말만 듣고 혹독한 겨울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채 물벼락을 맞았는데, 결국 지독한 독감으로 1684년 1월 사망한다. 명성왕후가 죽고 난 후 1686년, 명성왕후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던 숙종이 가장 사랑했던 희빈 장씨가 다시 궁에 입궐한다. 이에 서인세력과 인현왕후 민씨 세력의 반발이 격렬하였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그 원인으로 장씨를 지목하거나, 제왕은 여색을 멀리해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희빈 장씨를 어떡하든 궁에서 쫓아낼 궁리만 하는 서인세력들... 숙종은 희빈 장씨를 보호하기 위해 인현왕후 세력에서 멀리 떼어놓기 위해 창경궁에 비밀리에 처소를 새로 마련하였고, 1686년 12월에 직접 희빈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봉해 정식 후궁으로 올린다. 이러자 희빈 장씨의 출궁을 종용하던 서인세력은 더이상 숙종에게 장씨를 출궁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없게 된다. 

키야 ~ 숙종 임금은 복도 많아!

1688년 소의(내명부 정2품)로 승격한 희빈 장씨는 숙종의 장남 '윤'을 낳았다. 이 아이가 훗날 20대왕 경종이다. 어쨋든 아이가 태어나서 숙종과 희빈은 너무 감격했겠지만, 반대파인 서인세력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들은 현재 죽은 대왕대비 조씨(자의대비)의 상 중임을 앞세워 희빈 장씨의 득남에 축하는 커녕 하례인사조차 하지 않았고, 심지어 숙종에게서 어명을 받아 입궁해서 산후조리를 도우라는 장씨의 생모 윤씨를 상대로 지평 이익수가 사헌부 관원들에게 명을 내려 그녀를 가마에서 강제로 끌어내고 또 하인들조차 매를 때리고 체포하였다. 

1689년 1월, 숙종은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 '윤'에게 원자 명호를 내린다. 또한 장씨를 정1품 '빈'으로 책봉하여 후궁 1위로 올려놓았으며, 서인을 상대로 이미 종묘사직에 고한 일을 무르라는 것은 선대왕들을 한번에 능멸하는 행위이자 신권이 왕권 위에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서인은 소극적으로 반박 의사를 표현하고 말았지만, 숙종은 이 또한 용서하지 않고 그들을 파직하였다. 물론 앞서 김만중 치죄사건도 있고 해서 '이때다!' 싶어 왕의 최측근 요직인 삼사와 승정원, 사간원 등 요직에 있던 서인들을 파직시키고, 경신환국 때 실권하여 은신중이던 남인들을 조정으로 불러 중앙요직을 남인세력으로 교체해버린다. 

"지금 원자의 호를 정하고자 하는데, 따르지 않을 자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라."(숙종)
"신이 물러가기는 하겠으나 중전의 춘추가 한창이시니 이번에 하시는 일은 너무 이른 것입니다."(서인 남용익)

 
1689년 2월, 숙종은 장희빈의 선조 3대를 정승으로 추증했고, 그녀의 외조부인 역관 윤성립을 2품 정경으로 추증하고, 외삼촌 윤정석에게 사포별제라는 직을 내려준다. 이로써 더이상 희빈 장씨가 비천한 역관 가문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해준다. 

반응형

4월23일은 인현왕후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엔 대왕대비 조씨(자의대비)의 국상기간이기도 하기에, 숙종은 국상기간에 탄일 하례 의식을 생략하라는 어명을 내렸는데, 중전인 인현왕후는 국모의 당연한 권리라는 이유로 어명을 무시하고 생일을 치룬다. 이에 숙종은 분노하게 되고, 결국 크게 부부싸움이 일어난다. 인현왕후가 화가 나면 말을 서슴없이 하는 버릇이 있었는지... 그녀는 숙종에게 어찌할 것이냐며 자신을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는 과격한 언사들을 입에 담았다. 이때 또 서인세력들도 인현왕후를 옹호하고 나섰다. 서인 86인이 상소를 올려 국모의 위엄을 훼손한 숙종을 맹렬히 비판하며 중전의 명예회복을 요구하자, 숙종은 이 상소에 극노한다!

숙종은 상소를 올린 서인 86인을 파직하였고, 중전 민씨의 친오빠 민진원 형제에게도 국문을 내리고, 동시에 남인측에서 상소의 내용을 적극 비판하면서 서인에게 극형을 내릴 것을 종용하게 되고, 결국 서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남인이 다시 정계를 쥐게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난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쫓은 목적은 단 하나다. 바로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아 그녀와 아들 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기사환국으로 인해 서인들이 대거 쫓겨났지만 인현왕후가 버티고 있는 한 서인세력은 다시 일어날 것이고,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지 않는 한 원자 윤은 서자 신분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우암 송시열..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고, 결국 유배가는 도중(정읍) 사약을 받았다

5월 2일, 숙종은 당시 사대부 여성으로써는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발언을 했던 중전 민씨의 언사를 낱낱이 폭로하여 공개적으로 망신시킨 후 폐서인하여 강제로 출궁시켰다. 5월 13일, 중전 민씨가 폐출된 후, 원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을 것을 선포한다. 이것은 중인 출신이자 궁녀출신인 후궁이 국모의 자리에 오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반응형
HIMstorybl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