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정미환국~보복의도가 너무 지나쳐 버림받은 노론 그리고 환국으로 다시 정계를 잡은 소론. 그러나 '이인좌의 난'과 계속된 역모로 기세를 펴지 못하였다. 탕평책도 소용없구나 ~

2024. 3. 23. 21:48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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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영조는 즉위하면서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송인명*조문명 등의 말을 들어 탕평책을 펴나간다. 그래서 을사환국으로 정국을 소론에서 노론으로 물갈이 했던 영조. 노론이 정권을 잡자 노론은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고집하였다. 탕평책을 바랬던 영조는 적당히 해야지 너무 보복에 치우쳐 대사를 그르치면 안된다며 일단 타이르고 본다. 이미 죽은 조태구, 최석항의 관작을 추탈하고 유봉휘를 유배했으며 이광좌와 조태억을 삭출하는 선에서 끝내야지, 노론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토적(역적토벌)을 외치며 영조를 질리게 하였다. 이에 영조는 탕평을 위해 노론 탕평파를 선택한다.

노론 홍치중을 정승자리에 앉히고 정호를 영의정에 명하고 대신 좌의정 민진원과 우의정 이관명을 사직한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노론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하기에, 결국 영의정에 소론인 이광좌, 좌의정에 소론 조태억을 임명하고 그러면서  여러 노론들을 파면해버린다. 과거 파면되었던 이광좌와 조태억을 기용해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참여시킨다. 이렇게 해서 다시 소론 정권으로 물갈이 한다. 이때가 정미년이기 때문에 '정미환국'이라 한다. 

이러한 영조의 탕평정책에 대해 사실 소론들과 아직 정계진출 대기중인 준론들은 당황한다. 결국 그들끼리 뭉쳐 난을 일이키게 되는데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으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도 관련이 있으니 경종의 보복을 명분삼아 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였고, 이러한 의도는 당인들을 결속시키고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였으며, 민심을 규합하는데에도 이용되었다. 또한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심유현의 발설과 결부시켜 흉언을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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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역모세력이 청주성을 점령하고 기세가 등등하였다.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군관 홍림을 살해하고, 권서봉을 목사로 삼고 신천영을 병사로 삼아 여러 읍에 격문을 띄워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 주었다. 또 경종의 위패를 설치해 조석으로 곡배하였다.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하며 한성으로 진군을 서둘렀다.

영조는 소론측에서 일으킨 난은 소론이 평정하라며 오명항을 중심으로 토벌군을 파견한다. 안성과 죽산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청주 상당성을 궤멸시킨다. 소론에서는 이 반란군을 진압함으로써 명분을 쌓고자 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의 세제시절부터 자신과 함께 해 준 노론에게 애정이 더 있었기에 결국 소론도 정권을 잡았어도 '이인좌의 난'과 계속 된 역모로 기세를 펴지 못했다. 

준론과 남임의 끝없는 반역 시도에 소론은 정치적 의를 내세울 명분을 잃었으며, 1755년엔 <나주괘서사건>으로 그나마 복권되었던 소론들이 추탈되고 역당으로 몰리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영조는 소론을 향한 노론의 맹공세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준다. 하지만, 노론이 남구만 유상운까지 거론하며 자신들을 정당화하자, 영조는 결국 또 분노하고 노론들에게 일갈하며 " 내 예순의 늙은이지만, 내 왕권의 상징인 태아검이 있는 줄 경들은 알 것이다. 다시 과거사를 들추어내면 노론이래도 역률로 다스리겠다!"라며 엄포를 놓고 더이상 대소신료들을 보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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