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9년)영조와 탕평파의 노력의 산물 기유처분;탕평책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한 기유처분. 비록 완벽하진 못했지만 양쪽의 협력과 대립을 조성하여 정국안정을 꾀하다.

2024. 3. 24. 21:01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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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이란 임금의 정치가 치우침이 없고 당파가 없는 공정한 상태를 뜻하며, 영조는 탕평책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겪고 난 뒤, 각 붕당 모두에 역적과 충신이 있으므로 붕당을 타파하고 각 붕당의 인재를 고루 사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탕평책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하여 기유처분을 선언한 의미다. 영조는 "당습을 조정하려면 탕평 외에는 다른 계책이 없다..."라면서 탕평의 의지를 재천명했다. 그가 주창한 탕평이란 당파적 주장을 앞세우기보다는 군주권 앞에서 붕당은 타파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온건파 중심의 등용을 통한 '완론탕평'을 의미한다. 또 "경종께 충성하는 자는 나에게도 충성함이 되고, 나에게 충성하는 자는 경종께도 충성함이 되는 것이다."라며 경종과 자신에 대한 충의를 하나로 연결한 정미환국 당시의 원론을 유지한다. 

또한 탕평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쌍거호대' 인사원칙을 추구하였다. 쌍거호대란, 주요관직에 각 당의 인사를 고루 분배하는 것을 뜻한다. 이조판서에 노론 인사를 임명하면 차관급에는 소론인사를 임명하고, 이조 참의에 노론을 임명하면 이조전랑에 소론을 임명하는 방식이다. 결국 기유처분을 계기로 일당이 독주하던 환국정치가 종식되고 양당의 화목을 권장하는 탕평정치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유처분은 노론4대신의 복관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광좌 등 집권 소론의 반발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훗날 도승지 홍경보가 기유처분은 단지 양쪽을 진정시키기 위한 방도일 뿐이였다는 비판에 영조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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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협력 및 대립 구도를 조성하여 정국안정을 꾀했던 영조의 노력들이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노론과 소론의 연정이 구축되었다는 면에서 숙종과 경종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할 수 있다. 환국으로 대규모 숙청이 일어났던 숙종*경종때와는 달리, 영조는 양쪽의 협력과 화해를 이끌어내어 사림정치를 지향하는 모범적인 조선 군왕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러나 영조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반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1728년 11월에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가 1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2년 뒤인 1790년 영조의 자녀를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궁중의 은밀한 곳에서 저주행위가 행해졌음이 보고되었다.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모반의 움직임이 포착되어 옥사가 확대되었고, 결과적으로 무신란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던 준소*남인계열 핵심인물들이 대거 제거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영조의 통치를 거부하는 반왕흉서들이 산발적으로 등장하였고, 반왕 세력의 모반 시도는 단순히 영조의 왕위계승이 부당하는 이념적 공감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당시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던 준소*남인 세력이 친 배수의 진이나 다름없었다. 

어쨋든, 기유처분 이후 소론 내부에서 준론(강경파)을 이끌던 이광좌가 물러나고, 노론의 온건파세력인 홍치중과 김재로가 정승이 되었다. 이로서 소론과 노론은 연정을 하게 되었고, 영조는 이를 바탕으로 탕평책을 가속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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