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7. 23:14ㆍ그날의 이야기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지능과 학업을 보였을 정도로 똘똘하였고,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정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통치기간 동안 여러 결정에 그 영향이 반영되기도 하였다. 영조와 정조는 모두 붕당정치의 폐단 속에서 왕위에 올랐다. 때문에 둘 다 붕당싸움을 다스리는데 힘 쓴 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경종이 소론이 우위인 상황에서 정치를 다스렸고, 갑자기 경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이 왕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맘고생이 많았다. 이때 노론이 연잉군을 지지하며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왕이 된 영조는 본격적으로 '탕평책'을 내세우며 당파에 무관하게 관리들을 노론과 소론, 남인 등에서 골고루 등용하려 애썼다. 사실 영조의 지지기반이 노론이였기에 영조는 집권말기까지도 노론과 함께 하는 경향이 짙었다. 1776년(병신년), 이제 영조의 손자 정조가 드디어 왕위에 오른다. 정조는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개혁군주로 기억된다. 정조의 즉위는 단순히 왕위계승을 넘어 조선의 정치*사회적 변화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는 걸 반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아서 정조 또한 왕위에 오르기까지 순탄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지했던 관리들을 벌하기 보다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정신을 이어가겠다고 선포하고, 붕당간의 갈등을 최소화하며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정조는 특히 학문의 깊이가 깊어 관리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즉위 직후 1776년 6월, 창덕궁 후원의 중심공간에 규장각을 세우고 개혁정치의 중심공간으로 삼았다. 참고로 규장각은 세조 때 이미 양성지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종정시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두어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친필 현판을 걸고 역대 왕들의 어제나 어필 등 일부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후 유명무실했던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정치기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규장각에서는 역대 왕의 글이나 책을 정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개혁정치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법고창신 : 전통을 본 받아 새것을 창출한다' 이것은 규장각을 설립한 취지를 아주 올바르게 나타내준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옳고그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신하들에게 당당히 밝히고 당파에 게으치 않고 관리를 두루 등용하였는데, 능력과 실력을 겸비하였다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와 같은 서얼에서도 적극 등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대를 대표하는 정약용 같은 학자들이 함께 규장각에 나와 연구하면서 정조 개혁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고, 이후 규장각은 조선 후기 문화중흥을 이끌어가는 두뇌집단의 산실로 거듭난다.
정조는 궁궐내의 모든 시설물은 전쟁이나 약탈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판단하여 국방상 안전지대인 강화도에 규장각의 지방분소격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다. 1782년(정조6년) 2월 외규장각 완공을 알리는 강화유수의 보고가 올라왔고, 이를 계기로 외규장각에서 왕실의 주요자료가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정조의 정치적 개혁은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체제 강화와 관료시스템의 현대화에 중점을 두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관료체제를 개혁하고, 국가운영 시스템에 있어서도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울러 농업기술 개선과 상업활동 증진을 추구하며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데 기여하였다.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여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도모하였다. 또한 한글연구와 발전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지식의 보급에 힘썼다. 이처럼 정조대왕의 생애는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었으며, 그의 통치는 조선왕조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비록 '죄인의 아들'이라는 큰 짐을 지고 왕위에 올랐지만 복수의 정치 대신 '탕평'의 정치를 택하여 어진 정치를 펼치고, 학문연구에 바탕을 두고 개혁 정치의 방향을 잡았기에 정조 시대는 영조와 더불어 18세기 정치*문화의 중흥시대로 평가받는다.
초계문신제도 - 이미 과거를 거친 사람 가운데 37살 이하의 젊은 인재를 뽑아 3년 동안 특별교육을 시키는 제도다. 이들은 매월 2차례에 걸쳐 시험을 치르며 강도 높은 교육을 받는다. 초계문신제도는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동안 10여차례 이뤄졌다. 이 제도는 사실 정조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정치적 장치이기도 하였다. 정조5년에 16명을 선발한 것을 시작으로 정조말년까지 10회에 걸쳐 모두 138명이 선발되었다. 정약용, 서유구 등 대표적인 실학자들 역시 초계문신을 거쳐 성장하였고, 남이닝나 북인계 인물들도 초계문신에 뽑혀 정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