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천주교 전래;최초의 세례자 이승훈,마테오릿치,신유박해,황사영백서사건,병인박해,천주실의 등.

2024. 5. 23. 17:51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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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중국은 명나라 시대이다. 1582년 중국 명나라에 마테오릿치 신부가 도착한다. 마테오릿치 신부는 서양과학은 물론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으며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존중했다. 그는 중국 문화를 연구하면서 유교의 '천체'와 하나님을 동질의 개념으로 보고 기독교와 유교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전추실의'를 저술하였다. 

당시 조선은 중국에 '사대의 예'를 위해 정기적으로 중국에 부연사를 파송하였는데, 당시 부연사 일행은 천주교 성당에 종종 들러서 외국 천주교 신부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그들을 통하여 천주교 신앙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과 천문, 지리, 역법같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었고 이 속에 자연스레 천주교도 새로운 학문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연사의 일행이였던 이수광은 1625년 인조에게 '천주실의'를 소개하였고, 정두원은 과학서적과 서양의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 서양 풍속, 지리, 천문학, 지구의, '곤여만국전도'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처럼 최초 천주교는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구적 가치로써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인들에게 전래되었다. 

17세기 후반,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에 의해 천주교가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강학을 통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외국 선교사의 활동없이 신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당시 남인은 성호 이익의 영향을 받은 근기 남인이였다. 안정복, 정약전 등이 여기에 속했다. 이들은 집권세력이였던 노론이 지배하는 조선사회의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 성리학을 벗어나 범유학적인 입장에서 개혁의 논리를 찾던 중 서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어쨋든 당시 서양사상은 동양의 유교사상과 근본적으로 배치되지 않았고, 종교적이기 보다는 학문의 대상으로서 흠모되었기에 이때까지는 조정에서 천주교를 금기시 하지 않았다. 서학에 대한 관심은 명분만 앞세우는 주자학과는 달리 실학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결국 천주교는 남인계 실학자들을 통해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 뚜렷한 한 부류의 사랑으로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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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최초 세례받은 인물은 이승훈이다. 그는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 그라몽에게 세례받고 귀국하여 정약용, 이벽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김범우라는 자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열어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 참고로 김범우 집터가 지금의 명동성당이다. 

이승훈_천주교전래, 세례

천주교 교리는 천주(하느님)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이며 내세에서의 영생,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실천 등을 강조하면서 현실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위안이 되는 내용으로써, 당시 차별받던 하층민, 중인, 상민과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교세가 점차 확장되고 천주교 우상숭배금지 사고방식이 유교제사의식을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나자, 결국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이류를 들어 조정에서도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박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정조 대왕시절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였으나 순조때에 이르러 노론 강경파인 벽파의 집권으로 이승훈을 비롯하여 약 300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하는 '신유박해'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면서 천주교 탄압으로 더욱 거세어졌다. 

훗날 흥선대원군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러시아 남하를 막는데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천주교에 관대한 정책을 편다.  그러나 프랑스선교사들이 흥선대원군의 제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병인박해'를 일으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로 이어진다. 

흥선대원군

 

참고) 

*천주실의-마테오릿치 신부가 학문으로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로써, 동북아시아 유교전통 사회에 카톨릭신앙을 심어준 책이다.  동양문화권에 기독교 사상과 유교사상의 융합된 문헌이라는 점에서 종교사뿐 아니라 사상학적으로도 중시되는 책이다.

천주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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