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5년)을해옥사;나주괘서사건(윤지의 난)을 통해 소론을 몰락 시킨 영조. 그래도 어사 박문수는 특별히 신임하였다. 윤지의 비밀결사대, 능지

2024. 3. 31. 20:35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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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즉위할 당시 이에 위기를 느낀 소론의 급진세력과 남인들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이들의 불만은 결국 무신난(이인좌의 난)으로 표출되었고, 무신난이 진압된 뒤 또다시 윤지가 주도한 '나주괘서사건(윤지의 난)'이 얼어난다. 이것이 1755년 을해년에 발생하였기에 '을해옥사'라고도 부른다. 

나주괘서사건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755년 2월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나주의 객사 망화루 벽에 익명의 괘서가 붙은 사실을 보고받는다. 괘서에는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차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이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필시 무신여당의 행위라고 짐작하고 괘서의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할 것을 명한다. 수사 7일만에 나주에 살던 윤지가 주모자로 체포된다.

윤지라는 인물은 숙종때 과거급제하여 지평(사헌부 정5품)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윤취상은 형조판서였는데 1724년 김일경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문으로 고초를 겪고 죽었으며, 윤지도 당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년만에 나주로 이배되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 윤지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우선 아들 윤광철을 통해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학동들의 모임인 필묵계를 조직했다. 서울은 물론 충청도 지역에서도 뜻을 같이하는 집안들을 끌어들여 그 세력이 점점 방대해졌다. 사실 이 조직은 학동모임을 빙자한 거사를 위한 비밀결사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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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정월에 그는 조정을 비방하는 익명의 글을 작성하여 몰래 나주 객사에 붙였다. 그리고 영조의 명으로 조사에 착수한 포도대장의 수사망을 피해가지 못하고 40일만에 붙잡혔다. 윤지는 물론 윤지와 친분관계에 있던 나주 지역의 관리와 아전들, 또 윤지에게 학문을 배웠던 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서울의 소론 정치인들... 이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윤지는 영조의 직접심문을 받아.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백하지않고 버티다가 결국 능지처사되었다. 

무서운 형벌 - 능지처사

영조는 윤지의 아들 윤광철을 공개처형했다. 이 자리에는 사도세자를 비롯하여 문무백관과 도성의 백성들도 지켜보게 하였다. 이렇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절대권력을 과시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한 본보기로 삼았다. 이로써 윤지의 집안은 아버지 윤취상과 아들 윤광철까지 3대가 모두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결과가 되었다. 이들 외에도 주요범죄자 136명을 처형하였고, 700여건에 대한 처벌이 내려졌다.  당시 서예가이자 양명학자로 유명했던 이광사는 윤광철과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것 때문에 하옥되었는데, 그가 참형을 당한다는 소문에 그의 부인은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이광사는 23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유배지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박문수 등 일부 소론은 반성문을 제출함으로써 이런 파국을 면했다. 특히 영조는 박문수를 직접 안심시키고 여전히 신뢰하였다. 그러나 박문수는 죄인을 자처하고 집에 틀어박힌 채 살다가 이듬해 1756년에 사망했다. 

영조 재위기간에 여러 괘서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을해옥사는 단일 괘서사건으로써는 가장 많은 인명이 살상된 사건이였다. 영조는 을해옥사 이전에는 인내하고 타협하면서 탕평스타일로 서로 다른 정치세력을 모두 자신의 신하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을해옥사 이후에는 타협적인 면모는 거의 사라지고 각 붕당에 대한 강경한 태도가 두드러졌다. 강력한 권위로 붕당을 억압해 무당의 상태로 만든것이다. 어쨋든 을해옥사를 계기로 박시집, 박찬신 등 소론*준론의 명문가문과 유수원, 신치운 등 우수한 학자들이 대거 사형에 처해졌으며, 이로써 준론*완론 할 것없이 소론의 명문가들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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