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24. 23:16ㆍ그날의 이야기

유득공(1748~1807년)은 서얼출신으로써,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궁핍하게 생활해 나갔다. 당시는 적서의 구분이 분명했던 시대였기에 그는 20대 청년기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중국 일변도의 관념에서 벗어나 그의 글들엔 중국은 물론 만주, 몽고, 위구르, 티베트, 미얀마, 대만, 일본이 언급되었다. 남들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발해사에 그가 깊은 관심을 가진것도 어쩌면 그런 신분적 소외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27살에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고, 32세에 규장각 검서관(사서)에 임명되었다. 그때 그는 다양한 역사서를 읽으면서 발해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사료의 부족을 절감했기에, 오죽했으면 [발해고]서문에 "아! 문헌이 흩어진지 수백년이 지난뒤라 역사서를 지으려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라며 한탄하였다.

도데체 왜 고려시대에 발해사를 편찬하지 못했을까...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망하고 그것을 계승한 고려가 <삼국사>를 편찬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가 남쪽의 신라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북쪽의 발해도 계승하였으므로 남북국사를 지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관련 서적을 편찬하지 않은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 할 수 있다. 발해는 북쪽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망했다.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만명이나 되었다. 만약 찾아보려 했다면 충분히 사관이 있었을 것이고, 만약 없더라면 세자에게 물어봐서라도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당나라 사람이였던 장건장은 <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사람이 10여만명이나 되는 발해유민들을 받아들이고서도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음은 매우 통탄할 일이라고 하였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쓴 동기를 서문에 밝혔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는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편찬하려 했으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않은 것을 지적하면서 발해의 역사를 담은 발해고를 저술하였다.
발해는 698~925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걸쳐 남북국을 이루었던 국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대조영이 고구려정신을 계승하고 건국하였다. 696년 요서지방.. 이곳엔 거란족은 물론 말갈족, 고구려유민, 해족 등 이민족이 다수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696년 5월, 거란족 수장들이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고 일어나 현재의 베이징인 유주지역까지 공격을 가하였다. 여기에 대조영 집단도 가세하였으며, 말갈추장이였던 걸사비우 집단도 동참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하였다.

당나라 측에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대조영의 아버지와 걸사비우에게 직위를 내리고 회유하려 하였으나, 걸사비우가 거절하고 죽임을 당하고 동시에 아버지 걸걸중상도 해당 시기에 사망하게 된다. 결국 대조영은 두 집단을 통합하고 당군의 추적에서 벗어나, 영주에서 멀리 떨어진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한다. 곧 대조영 자신이 원해서 건국을 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 군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대조영은 순수 고구려인이 아니라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조영은 분명 고구려 장수였으나,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반란의 가능성 있는 자나 그 가문을 중국으로 강제 이주시킬 때 그 대상자였다고 한다. 고구려가 멸망할 시기에 유력가문 중 하나로 성장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래서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봐야하며 이것이 그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동시에 통솔할 수 있는 이유였다고 한다.

대조영은 이해고를 격파하고 '동모산'에 터를 잡아 개국하였으며, 국토는 사방 5000리요, 호구는 10여만호이며, 강력한 군사는 수만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요나라의 침략으로 발해가 멸망하자 고려에 항복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은 고려 태조에게 수만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고려로 왔다. 태조가 왕계라는 같은 왕씨의 성명을 내려주고 왕실의 종적에 덧붙였다. 요나라에서 고려태조에게 낙타 50필을 주었는데, 태조 왕건은 동족(발해)을 멸한 웬수로 여겨 교린을 하지 않았으며, 사신 30여명은 섬으로 유배시키고 낙타는 만부교아래 메어 모두 굶겨 죽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만부교 사건'이다. 이후 요나라의 침략으로 양규의 흥화진, 서희의 강동 6주, 귀주대첩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발해의 멸망은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데, '발해고'에도 "발해의 멸망이 어느 때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적혀있다.

아무튼, 유득공은 정조8년에 한국사의 판도를 만주 일대로 확장한 최초의 저서 [발해고]를 집필하였다. 이것은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원상복구시킨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고]는 '박제가의 서문' '유득공의 서문'으로 시작해서 발해의 역대 임금 및 신하들 그리고 지리, 관직, 의장, 특산물, 언어, 문서, 후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역사적 사실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발해사'가 아니라 '발해고'가 된 까닥을 밝혔는데, "'(고)라고 한 것은 사서로서 체계를 이루지 못하였고, 또 감히 (사)라고 자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관련된 역사서가 충분치 못했기에 '고'를 선택한게 아닐까싶으며, 그의 학자로서의 겸손함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