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19. 15:25ㆍ그날의 이야기
조선 후기 사회는 삼정(전정, 군정, 환곡) 문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다. 토지세가 과중히 부과되었고 관리들의 착복이 심했으며, 군포의 징수과정에서도 중앙권력과 연계되어 있는 부정부패가 빈번하였다. 단순히 암행어사 파견정도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였다. 또한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환곡제도는 관리들의 부정과 고리대금으로 변질되어 농민들에겐 매우 큰 고통이였다. 이 뿐인가? 연이은 흉년과 자연재해는 경제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농촌사회가 피폐해져 가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이를 보다못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것은 뻔한 것이고, 결국 1862년 3월, 경남 진주에서 유계춘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그들은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관아를 습격해서 불태웠으며, 삼정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지배층의 압제에 대해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립하였으며, 진주에서 시작된 이 봉기는 곧 경상도전역과 전라도, 충청도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각 지역의 농민들도 삼정문란과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동참했던 것이다. 이러한 저항 속에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성장하였고, 항쟁으로 말미암아 양반중심 통치체제도 서서히 무너져 갔다.
정부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한편으론 민심을 달래기 위한 임시 대책을 시행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각 지도자들을 처형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정부는 봉기의 원인으로 삼정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임술농민봉기는 농민 봉기의 시초로써, 이후 동학농민운동 등 봉기에 영향을 주었고, 농민들도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개혁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임술농민봉기'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농민 저항운동으로, 단순한 농민들의 저항을 넘어 조선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이후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