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1. 23:48ㆍ그날의 이야기
1820년,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인 이하응이 태어난다. 그는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또 17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후, 부모없이 정처없는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다. 이 시기엔 안동김씨가 왕실세력을 잡고 흔든 시절이기에, 이하응은 자구책으로 천하장안이라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리며, 안동김씨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와 친교를 맺고 조대비에게 접근한다. 이하응은 서화에 능했는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이때는 철종임금 시절이라, 장차 후계자 없이 철종이 돌아가실 것을 염려하며 왕위계승 문제로 왕실이 불안하였다. 이하응은 조대비에게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훗날의 고종)을 지명하기로 묵계하였고, 1863년 12월초,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이때부터 이하응은 흥선군에서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진다. 또한 조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까지 도맡아 처리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먼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일으키고자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색과 문벌을 따지지 않고 두루두루 인재를 등용하였고,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또한 군포제를 호포제로 바꿔 균일세로 개혁하여 양반에게도 세를 부과하였으며, <대전회통>,<육전조례>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확립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비변사를 폐하고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하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여기까지는 정말 훌륭했고 좋았다~
그는 중국 자금성의 규모가 부러워 경복궁 중건을 결심한다. 결국 경복궁 중건의 대역사를 착수하여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어 국민의원성을 산다. 또 1868년에는 천주교도 박해령을 내려 약 8천여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하는 대박해를 감행한다. 전통적인 유교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양군대를 물리친 후 쇄국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서양세력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서양문물을 배척하여, 넓은 세상을 읽지 못하는 스스로 우물에 빠진 개구리신세가 된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의 반려자로써 향반 여흥민씨 집안에서 고종의 비를 맞이한다. 이는 척족의 세도를 봉쇄하고자 함이였다. 그러나 민비는 고종을 움직여 최익현의 대원군탄핵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정계에서 추방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1873년 11월, 대원군은 하야하여 양주 곧은골로 은거한다. 며느리하나 잘못들여 신세가 전락해버린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왕명으로 사태수습을 위임받고 재집권하였지만, 갑작스레 청국군의 개입으로 일시적인 재집권이 되버렸고, 사태가 역전되면서 청국으로 연행되어 3년간 유폐생활을 겪는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야망을 버리지 못했다. 1885년 2월 본국으로 귀국한 뒤, 1887년 큰아들 재황을 옹립하여 재집권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1894년, 갑오경장 때 군국기무를 총괄하는 자리로 위임받아 임무를 수행하다가 곧 은퇴한다. 1895년 을미사변 발생! 일본군은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고자 흥선대원군을 받들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아관파천에 의하여 친러정부가 들어서자 대원군은 다시 양주 곧은골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1898년 2월 22일, 그는 79세 나이로 사망한다.
흥선대원군은 조선후기의 핵심적인 정치가였으며, 그의 개혁정책은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개혁은 일시적으로는 국력을 회복시키는데 기여는 하였지만, 많은 반발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역사적 평가와 논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복궁 중건 - 왕권강화 목적. 국가의 위엄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였으나,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었다.
*서원정리 - 전국에 산재한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유교사학의 폐단을 제거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하려하였다. 전국의 600여 곳 서원중 47곳만을 제외하고 모두 철폐하였다.
삼정개혁 -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을 바로 잡기 위하여, 전정의 개혁으로 토지세를 부과하고, 군정의 부정을 막기 위해 호포제를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도의 부정을 바로잡기 위해 환곡 대신 사창제를 도입하였다.
*쇄국정책 - 서양세력(선진국)과의 접촉을 차단하였고, 전통적인 유교질서를 지키기 위해 쇄국정책을 추진했다. 결국 이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같은 외세침략을 초래하였다.
*천주교 탄압 - 천주교를 위협적인 이단으로 간주하여 대대적인 대박해를 실시. 이는 병인박해로 절정에 달했으며,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