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아관파천,러일전쟁,국제사회에서 일본의 고립,대한제국 선포 등.

2024. 7. 16. 22:33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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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일본군과 친일 세력에 의해 명성황후(민비)가 시해된 사건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고, 조선정부는 일본의 압력 아래에서 갑오개혁을 추진하며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개혁과정에서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한다. 결국 조선 내부에서 친일파와 친러파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고, 명성황후는 친러파를 지지하며 일본의 간섭에 저항하였다. 또 당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경제개혁은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일본의 경제적 착취가 더 심해졌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였다. 일본군과 낭인들은 건청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훼손한 후 불태웠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질 못했지만,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을미사변 이후의 정치적 대응을 모색하였다.(아관파천, 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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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약화시키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귀해 자주 독립을 표방하였다. 

을미사변은 조선사회에서 반일감정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의병운동 등 저항운동으로 발전한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조선 민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민족주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일본의 잔혹한 행위는 국제사회에서도 비난을 받았으며 외교적 고립을 초래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와 일본 간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 경쟁이 심화되었으며, 결국 러일전쟁(1904~1905년)으로 이어진다. 을미사변의 여파로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확산되고,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는 등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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