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이재수의 난(The Uprising of Lee);천주교에 의해 차별받는 제주도민들의 반란. 지방통제력을 상실한 중앙정부. 조선 후기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보여주는 사건!

2024. 7. 22. 18:42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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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이재수의 난은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란으로 당시 천주교도와의 갈등으로 인해 그 원인이 발생한다. 19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천주교가 급속히 환산되고 있었으며, 기존 신앙체계와의 충돌이 잦았다. 제주도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토지를 매입하면서 지역 주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지방 관리들과 결탁하여 특혜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는 비천주교도 농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때 강봉헌이 제주도 봉세관으로 부임하면서 온갖 잡세를 부당하게 징수하였고, 이러한 일에 카톨릭교도들을 채용하였다. 또 교회가 부지를 매입하면서 신목*신당 등을 없애는 등 제주도민의 문화를 무시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도민들의 반감을 크게 산다. 

민란 봉기

조선 후기의 정치상황은 외세의 개입이 거세지면서 지방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대정군수 채구석과 유림 오대헌은 '상무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관노(또는 마부) 이재수는 제주도에서 활동하던 유교적 신념을 가진 인물로 천주교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천주교도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지역 농민들을 조직한다. 이재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먼저 일본인들로부터 입수한 무기로 무장하여 제주성을 점령하고 천주교도들을 공격했다. 반란군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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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이 일어나고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학살당하자 라쿨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함대에 도움을 요청하여 6월 1일 제주에 도착. 그러나 제주성은 함락되었고 천주교인 300여명이 이미 처형을 당한 뒤였다. 중앙정부는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강화진위대)를 파견하였고, 결국 난은 진압이 된다. 채구석을 제외한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 등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외 나머지 주동자들도 모두 징역에 처해졌다.  

학살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도와 비천주교도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 사건이 되었고, 농민들의 불만과 저항이 표출된 사건으로 이후의 사회적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 된다. 중앙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천주교인들의 보호 명목으로 열강의 개입이 더욱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이재수의 난은 조선 후기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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