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국채보상운동;대구 기념공원, 고종황제 강제퇴위되고 순종즉위, 한일신협약, 신민회,한일합방,영친왕,군대해산,동양척식주식회사,국권피탈 등.

2024. 7. 26. 22:46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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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기념비

1904년 러일전쟁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경제적 예속을 심화시키기 위해 막대한 외채를 빌려주었다. 고리대금과 불평등 조약을 통해 경제적 지배력을 강화하고 대한제국의 경제적 자립을 저해하였다. 일본으로부터 빌린 외채가 늘어나면서 대한제국은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경제적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외채를 갚고자 하는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서상돈, 김광제

1907년 2월, 대구에서 서상돈과 김광제 등 유학자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한다. "금연과 금주를 통해 절약한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에서 먼저 시작되고 서울, 평양, 부산 등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으며 각계각층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또 당시 신문사였던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며 참여를 독려하였고,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 후원회 설립을 지원하고, 관련 기사를 지속적으로 게재하며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한매일신보] 대표적 애국계몽 민족지 대한매일신보

금연과 금주 운동을 통해 절약한 돈으로 다양한 기부행사를 개최하여 자금을 모았다. 모금액은 각 지역별로 집계되어 중앙으로 송금되었다. 각 종 집회와 강연을 통해 국민들에게 외채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했듯이,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외채문제를 교육하고 학생들이 모금활동에 참여토록 장려하였다. 

조선총독부와 친일파들은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하였고, 모금된 자금을 압수하거나 방해하려 하였고, 일본은 국채보상운동이 한국의 경제적 자주성을 높이고, 반일감정을 고취시킬 것을 우려하여 방해공작을 펼쳤다. 결국 일본의 탄압과 경제적 현실로 인해 운동이 초기의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이후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민족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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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과 친일파들은 사실을 왜곡시키기에 바빴고, 고종황제에게 책임추궁하며 1907년 7월 19일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키고 27대 순종황제를 즉위시킨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출생한 둘째아들이다. 첫째아들은 항문없이 태어나 출생후 5일만에 죽었었다. 아무튼, 순종이 즉위한 뒤 5일만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인의 대한제국 관리임용을 허용했으며, 8월 1일에는 일본의 압력과 친일파들의 압박으로 '군대해산'을 한다. 12월에는 '황태자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영친왕(이은)을 볼모로 일본으로 끌고간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을 인가하였고, 일본과 친일파들은 국권탈취 공작을 추진하여 군부와 법무를 모두 폐지하고 정치조직을 통감부에 귀속시킨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910년 8월 16일, 이토 히로부미의 후임으로 데라우치 마사타게가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비밀리에 '합병'조약안을 제시하며 어전회의가 개최된다. 이때 옥새를 치마폭에 감춰 지키고 있던 순정효황후. 이완용 및 송병준 등 친일파들이 순정효황후에게 강요하여도 옥새를 내놓지 않자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겨 어쩔수없이 순종이 조약안에 날인을 한다. 이로인해 조선왕조 27대(519년) 종묘사직이 무너지고 국권이 피탈되며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다...<한일합방(경술국치)>

한일합방...조선이 일본에 넘어가던 날<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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