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3. 23:12ㆍ그날의 이야기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경찰국가 체제를 구축한다. 이에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은 점차 지하로 숨어들며 조직화되었고,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에 저항하였다. 1910년 12월, 평양 인근 안악군에서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미수사건을 빌미로 일본경찰들이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하였고(대략 600명), 잡혀간 자들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하거나 모진 고문속에 죽임을 당하였다.
1911년엔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과 김구, 이갑 등을 포함해서 105명의 독립운동가를 체포한다. 일본은 페초된 독립운동가들에게 허위자백을 강요하고 조작된 증거를 만들어냈으며, 조선총독부에 대한 테러를 계획한 혐의로 모두 기소하였다. 대부분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주요인물들은 중형이나 사형을 선고받았다.
105인 사건은 일본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례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으며, 이로 인해 독립운동 조직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항일독립운동단체 '신민회'가 해체되고 만다. 그 후 이 사건이 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국제적으로도 일본의 강압적이고 불법적인 탄압방식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저항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반발하여 독립운동에 나섰고, 이후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이어진다.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강압적 통치와 독립운동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범위를 차지한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통치의 부당함과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을 알 수 있으며,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