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숭무학교;멕시코로 이주한 1천여명의 조선인들,멕시코 유카탄 메리다지역, 도산 안창호, 대한인 국민회, 독립운동 주역들 등.

2024. 7. 31. 20:12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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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이민 모집광고(1905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인해 조선(대한제국)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로인해 조선인들은 독립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게 도었고, 그 중 하나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가 양성이였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중국 등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1910년 멕시코로 이주해 간 한인들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새로운 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 그곳이 바로 '숭무학교'다. 대한제국기에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 수많은 한인들이 해외의 농장과 계약을 맺고 이주하였는데, 미국 하와이를 시작으로 메시코 유카탄의 메리다지역으로 약 1천여명의 한인들이 이주했다.

멕시코로 이주한 이민자들

멕시코 한인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 국민회의 도움으로 메리다 지방회를 설립, 이들 중 군인출신들이 많았기에 가장 두드러진 활동이 군인양성이였으며, 메리다 지방회가 조직된 직후부터 유카탄의 띄티 (Tetiz) , 작둔 (Chactun) , 쏘실 (Soctzil) 등 3곳의 농장에서 여가를 활용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당시 메리다 지방회장 이근영은 무예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멕시코 한인들의 이러한 의식은 군인양성기관인 숭무학교의 창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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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무학교는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교육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으며, 학생들에게 군사훈련(무기사용, 게릴라전 등) 및 민족적 자부심 고취와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정치학, 역사 등을 가르쳐 독립운동의 주체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였다. 이근영이 직접 저술한 <군무요령> <보병요조초선>을 교본으로 활용하였고, 총 118명의 생도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진다. 숭무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만주, 중국 및 대한제국 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숭무학교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 

대한인 국민회 총회장 자격으로 멕시코를 순방한 도산 안창호 선생과 지회 임원들

하지만 1913년 유카탄의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많은 한인들이 터전을 옮기게 되자 숭무학교의 생도들도 가족을 따라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된다. 여기에 '멕시코혁명'까지 일어나면서 더이상 학교유지가 힘들어졌고, 결국 1913년 3월 폐교되었다. 비록 그 역사가 3년의 짧은 기간이였지만 숭무학교의 설립과 활동으로 독립운동의 리더들을 양성하여 대한제국 독립을 위한 초석을 열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정신은 우리 한민족의 가슴과 피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돌아갈 조국 조선은 결국 나라를 잃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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