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조선물산장려회 창립, 육군 주만참의부, 신은행령;"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조선 경제적 자립을 막기위한 일제의 만행.

2024. 8. 25. 19:43그날의 이야기

반응형

일제는 우리나라의 쌀을 헐값게 사가고, 반대로 일본에서 생산된 물건들을 조선에 팔았다. 대량생산 된 일제의 제품들이 밀려들어오자 국내기업의 제품들이 경쟁에서 밀리게 되자,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가 설립되고  [우리가 만든것 우리가 쓰자]라는 표어를 걸고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국내의 자본력을 키우고, 조선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각계각층 인사들이 뜻을 모았다. 

물산장려운동은 쉽게 말해 우리 제품을 애용하자는 운동이다. 일본 상품 배척과 함께 조선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단순히 상품애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조업을 발전시키고 중소기업을 지원하며 민존 자본을 육성하는데 힘썼다. 서울에서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활대되었으며 특히 여성과 학생들의 참여가 활발했다. 이 운동이 점차적으로 커지자 일본 당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탄압과 검열을 통해 운동을 억압하였다. 처음 시작은 좋았으나 결국 끝이 너무 아쉬웠던 물산장려운동이였다.

육군주만참의부 부대원들

3*1운동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만련하고 계속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세력을 통합하고 효과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육군주만참의부를 설립한다. 육군주만참의부는 다른 독립군 조직과 협력하거나 통합을 시도하며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이끌며, 주로 일본군과 만주 군벌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후 다른 독립군 단체와 함께 의열단, 한국독립군 등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반응형

 
'신은행령'은 일제가 조선에서 금융기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시행한 법령이다. 일제는 조선의 금융시스템을 장악하고 자국(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선 내 은행과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강화가 필요하다 느꼈다. 조선을 식민지로서 더욱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금융시스템 통제는 필수적이였다. 신은행령은 조선에서 새로운 은행을 설립하는데 엄격한 조건을 부과하고, 조선인이 은행을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일본계 은행이 조선의 금융시장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존의 조선 내 금융기관들을 일본계 은행으로 통합시키거나 일본 자본이 참여한 은행만이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신은행령으로 인해 조선의 금융권은 일본 자본에 예속되었으며, 조선인의 경제적 자립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는 결국 조선의 국내자본 성장이 저해되었고, 조선 경제는 일본의 식민지 경제체제에 더욱 깊이 편입될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은행령'은 은행관련 명령이란 뜻이며 일제시대에 2번 있었다. 1912년 10월에 최초 은행령이 시행되었고 한국인은 은행 만들길 어렵게 하였다. 그리고 강제로 한국은행들을 합쳐버린게 '신 은행령'이다. 어쨋든 당시 은행령은 조선의 재정을 박살내고 일본인들만 개이득 보게 하려고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