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31. 16:53ㆍ그날의 이야기

1925년 4월 25일, 당시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와 일본유학생계의 '북풍회' 그리고 그 외 구성원 19명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다. 당 조직은 책임비서에 김재봉, 조직부장 조동우, 선전부장 김참 등이였다. 원칙적으로 동일선상에서 늘 경쟁관계였던 그들이였지만 함께 좌파세력 확충에 힘쓰면서, 이미 민족주의자들의 각 종 기성단체에 침투하여 분할공작과 사상, 노동, 청년 등의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는 방해를 벌였다. 이것을 결성하는 모체는 한국내 공산당 결성의 밀명을 받고 서울에 잠입한 김재봉이였다. 그는 1923년 6월 서울에 설치된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또는 제3인터내셔널)의 책임자였다.

공산당을 결성하고 신문에 창당게시글을 올렸다.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이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그 한 지부로서 폭력혁명에 의거하거 공산주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조선의 문제로서는 공산당 지도 아래에 노동자*농민의 결합에 의하여 공동전선을 전개하고 일본제국의 통치를 변혁하여 그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려는데 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국가건설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은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족문제의 해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부로 된다. 조선에서의 혁명적인 의의는 이와같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민족운동을 원조함은 물론 전술로서 민족주의적 단체와 제휴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은 이미 배우고 있다. 노동운동으로 소작쟁의로 파고들어간다. 학교의 맹휴도 그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조직에서는 각 방면의 야체이카를 부식하고 모든 표현단체에 프락치를 만든다.](조선공산당 창당 전문)
이후 조선공산당은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이라는 뜻을 내세워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6*10만세운동도 그 배후에서 영향을 미쳤고, 신간회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1925년11월 '신의주 사건'으로 알려진 제1차 검거사건을 시작으로 1926년6월, 1928년2월과 7월 등 4차례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본래 이 검거사건은 일제의 보도통제로 신문에 전혀 나오지 않다가 1927년에 처음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결국 제3인터내셔널이 1928년에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함으로써 1928년 12월 7일 그 막을 내렸지만, 1945년 9월 12일, 해방 이후 다시 재건된다.

그리고 1925년 12에 일본과 조선간의 '미쓰야 협정(미쓰야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일본 조선총독부와 만주 펑톈성 사이의 협정으로, 주로 조선 내에서 공산주의의 반일운동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협약으로 일본과 중국군벌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공동으로 색출하고 체포하였고, 체포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결국 독립운동가들은 더이상 만주에서 안전하게 활동할 수 없었기에 생존을 위해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거나 러시아 등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지는 만주에서 국내와 중국대륙으로 옮겨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