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조선어학회 창립, 한인애국단 수립;우리말 보존, 한글맞춤법 통일 및 <우리말큰사전>,영화 말모이, 백범 김구, 윤봉길, 이봉창 의거. 광복군 창설의 기반.

2024. 9. 5. 15:33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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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한국영화 < 말모이 >

1931년엔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한국어와 글을 사용하는 것을 단속하고 금지시키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우리 모국어를 살리고 보존하기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1년에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등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학회'가 창립되었다. 원래 1921년에 조직된 단체 '조선어연구회'가 모태가 된다. 조선어학회는 우리 한국어의 연구와 보존, 보급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그 안에 표준어를 정립하고 맞춤법을 통일하고, 국어사전 편찬 등 주요과제를 이루어나갔다. 

1933년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였고 이것은 현대 한국어 표준 맞춤법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조선말 큰사전]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안타깝게도 일제의 탄압으로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19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0여명이 일제에 의해 검거 투옥되었으며, 해방 후 1949년 '한글학회'로 다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한글학회는 29년의 <조선어사전>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에 6권으로 이루어진 <우리말큰사전>을 완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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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931년 11월 10일,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애국단'이 설립되었다. 다른 독립운동단체와 다르게 이들은 일제 주요 인사를 암살할 목표로 뭉친 비밀결사대이며, 단원들은 김구의 지도하에 일제의 핵심 인사들을 타격함으로써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려 노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단원 이봉창은 도쿄에서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겨냥한 폭탄 투척 의거를 일으켰다. 비록 실패하였지만, 일본 제국의 심장부를 공격한 데에 큰 의의가 있는 사건이랄 수 있다.

또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의 전승기념 행사가 있었다. 이때 윤봉길 의사가 적 들에게 폭탄을 던져 그 자리에 있던 일본군 주요인사들을 처단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위상을 높이는 사건이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체제로 전환되어 영국의 버마 작전에도 일부 참전하고, 훗날 이것이 광복군 창설의 기반이 된다. 

[조선어학회]와 [한인애국단]은 일제강점하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한국어를 지키고 보급함으로써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족의 자존감을 지켜냈으며, 한인애국단은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여 전 세계에 독립의지를 강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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