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대한제국 순종황제 사망~'6·10만세운동', 정우회 선언, 조선 민흥회 창립;순종의 사망은 다시 독립의지를 불태우고 전국 만세시위로 이어지다. 신간회가 창립되어 좌파와 우파가 합작으로 독립전선을 구축하다.

2024. 9. 1. 22:58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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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사망한다. 순종의 장례식은 민족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로 인해 6*10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조선3대독립운동으로써, 순종 장례일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 민족독립운동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사회*정치적 이념차이를 초월해서 민족주의성향 학생들과 사회주의성향 학생들이 연대해 일으켰으며, 순종황제의 인산일을 맞아 중앙*중동학교, 연희*보성전문 등 학생들이 제2의 3*1운동으로 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하자는 뜻에서 장례 행렬을 따라 일으켰다.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어 고창, 순창, 청주, 평양, 홍성, 공주, 울산, 군산, 전주, 하동, 당진, 강경 등으로 퍼졌으며, 시위와 동맹휴학 등을 통해 일제에 대항한 역사적 민족운동이 되었다. 

6*10만세시위_순종 장례행렬

1927년에 신간회가 발족되었다. 신간회가 만들어질 당시 국내 분위기는 사회주의 계열(좌익)의 항일운동가들과 민족주의 계열(우익, 친일파 포함) 항일운동가들이 있었다.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로 나뉘어서 활동하고 있었으니 효과가 그닥 크지 못했을 것이고, 또 일제의 단속도 심했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1926년에 사회주의 단체인 '정우회'가 사회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정우회선언을 한다. 이 선언을 바탕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과 협동 전선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어 1927년 신간회가 발족된다. 이때부터 좌익과 우익의 연대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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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회 선언

1920년대에는 하도 독립이 안되니까 결국 친일파로 변질되는 민족주의자들도 생겨났다. 이들을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라고 하는데, 이와 반대로 비타협적민족주의자들이 있다. 말 그대로 일제에 비타협적 인물들이다. 1926년 7월 8일 서울에서 고려공산동맹의 사상운동단체인 '전진회'와 '조선물산 장려회'가 결합하여 '조선민흥회'라는 민족협동전선 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1926년 6~7월에 일어난 제2차 탄압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이 크게 파괴되자 조선공산당은 조선민흥회를 신간회에 흡수하게 하였으며, 발기인대회를 개최한 조선민흥회는 신간회와의 합동을 위해 김항규*명제세*권태석 등을 대표로 선정하였다. 이들은 신간회 대표인 홍명희*신석우*권동진 등과 회합하여 합의하에 신간회에 흡수되었다. 

조선민흥회는 우리 민족이 일제시대때 세운 단체였으며 좌파쪽 단체였다. 좌파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공산당) 현재의 좌파*우파 개념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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