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보천보 전투;김일성의 빛나는 업적? 결론은 소련 따까리...남한과 북한의 생각차이. 남한과 북한의 처참한 증거명으로만 남은 '보천보전투'.

2024. 9. 10. 18:03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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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김일성이 앞장섰다고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 기록화. 진실은 소련 따까리 ~

1930년대 초,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공산당은 '동북항일연군'이라는 항일 무장조직을 형성하고 일제에 맞서 싸워오고 있었다. 이때 지도자가 바로 김일성이다. 당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겪고 한반도와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일본은 한반도 내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였으며, 항일 세력은 만주를 기반으로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권총으로 신호탄을 쏘아올림으로써 동북항일연군 유격대는 함경남도 보천보 지역에서 경찰서와 여러 일본 통치기관들을 공격하고 불태웠다. 일본군은  즉각적으로 대응해 추격전을 벌였으나, 동북항일연군 유격대는 산악지형을 이용해 빠르게 치고 빠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항일무장투쟁이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상징적인 사건이였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이 한반도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한 사건으로 일제의 통치에 대한 저항의지를 대내외에 알렸으며, 한반도 내 항일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북한에서는 이후 김일성의 항일 영웅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이 전투로 인해 김일성이 항일투쟁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지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여전히 보천보전투를 매우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으며, 김일성의 항일투쟁의 업적을 기리는 주요사건으로 삼았다. 그래서 북한 역사에서는 이 전투가 여전히 김일성의 지도력과 항일투쟁의 의지를 상징하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고 한다. 어쨋든 '대첩'이라고 하기엔 뭣한 전과였고, '청사에 길이 빛날 전과'에는 턱없이 뭔가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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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보천보 전투'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온 이름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 상, 김일성이 이끄는 독립군 운운했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잡혀갈 수도 있거니와 동아일보가 호외까지 외쳐대며 흥분했던 기억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대포도, 비행기도, 탱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였지만' 그래도 '보천보를 일제의 폭압밑에 신음하던 우리 인민에게 조국해방의 서광을 안겨준 역사적 사변'으로 끌어올리며 '민족적 독립과 자주권을 부활시키려는 혁명적 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내외에 널리 보여준 건곤일척의 전투' 로 격상시켰다. 보천보 전투 당시 희생된 일본인의 상점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 쓰여진 글은 그 중 압권이다. 

<백전백승 강철의 령장이시며 천재적 전략가이신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몸소 조직하신 보천보 전투 때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인민의 피를 빨아먹던 이 일본놈 상점을 습격하고...> 

신념에 의해 그 실체가 좌우될 때 역사는 슬프다. '보천보 전투'는 남과 북을 가르는 처참한 증거명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보천보로 대변되는 반쪽을 잃었고, 저쪽은 보천보라는 이름으로 다른 반쪽을 덮었다...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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