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4. 20:51ㆍ그날의 이야기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쟁에 미친 일제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전쟁에 쓸 무기들을 만들기위해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을 아주 그냥 쥐어짜기 시작한다. 토종 개 삽살개를 다 잡아다가 방한복을 만들고, 교회와 학교 및 절에 있는 종까지 모두 끌어다가 금속이란 금속으로 총알 만들고 심지어 나이먹은 노친네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모두 징용*징병*학도병으로 끌고간다. [국가 총동원령 선포] 후 진짜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1938년 4월에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 법에 따라 조선의 인력, 물자, 산업 등이 일본의 군사적 요구에 맞춰 동원되었고, 농업생산물과 공산품의 수탈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조선의 많은 남성들이 공장 노동자로 또 군인으로 징집되었으며, 여성들도 군수공장에서 노동을 강요당하였다.
이런 국가총도원법과 함께 '지원병제'를 제정하여 조선 청년들을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지원하게끔 만들기도 하였다. 실상은 강제성에 가까운 동원정책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압박과 회유속에서 일본군에 입대해야했는데, 일본은 조선인을 일본의 '황국 신민'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원병제를 도입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군에 복무하였다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러다가 194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징병제가 시행되어 조선청년들이 의무적으로 군에 징집되어야만 하였다.
1938년 10월, 중국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한 무장 독립군 조직이며, 중국 전역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과 맞섰다. 주로 중국 내륙에서 활동하였으며, 중국군과 협력하여 정보수집, 파괴공작, 선전활동 등을 벌였다. 하지만 조선 의용대 내부에서도 이념적 갈등이 있었으며, 이로인해 분열되어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어 공산주의 노선을 따랐고, 일부는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