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6. 22:08ㆍ그날의 이야기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 초반에는 일본군이 승승장구를 했고, 일본은 태평양이나 그곳 작은 섬들의 지형을 활용해서 일종의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쓰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섬들을 활용해 미군을 제압할 수 있는 해상권이나 제공권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시설을 확충하고 여기에 투입될 인력에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하였다.
밀리환초(Mili Atoll)는 남태평양 마샬제도의 환초로 약 92개의 산호초 군집 가늘고 둥근 띠 모양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당시 일본군의 최전방 요충지였다. 1942년 초, 부산항에서 조선인 2400여명을 해군 군속 신분으로 태우고 출발해 전남에서 동원된 800여명은 밀리환초에 내려주고, 나머지는 다른 섬에 내려줬다. 밀리환초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이곳 비행장 활주로 공사 및 탄약고, 격납고, 지하호 등 군사시설 공사에 동원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연전연승 한 일본이였지만, 서서히 전세가 바뀌게 된다. 그리고 미군이 해상의 봉쇄를 하면서 보급로를 차단하게 되고, 1944년 6월부터 일본군은 그대로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다. 식량 및 무기가 조달이 안되는 상황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모두가 힘겹게 버티는 중, 조선인 군속 2명이 일본군 병사들에게 살해된다. 이때 일본군들은 살해된 조선인 시신을 인육으로 다져 '고래고기'로 위장해 조선인들에게 먹였다. 그 후, 조선인들은 무인도 어딘가에서 살점이 도려진 채 죽어있는 동료들의 시신을 발견하고 자신들에게 고래고기라고 한 것이 실은 그 조선인의 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시신들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고 특히 허벅지 살이 마치 포를 뜨듯이 살점이 모두 도려내져 있었다. 45년 3월경, 드디어 이에 분노에 찬 조선인들은 일본감시병들을 제거하고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일본군에게 돌과 곡괭이를 휘두르며 일본군 11명 중 7명을 죽이고 다른 섬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나머지 일본군이 옆 섬에 있던 일본군 지휘소에 이 상황을 알리게 되었고, 거기에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이 현장을 초토화시키며 조선인 55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학살된 조선인들은 전남 담양을 포함해 모두 전남출신들이였다. 이 당시 탈출에 성공한 한 조선인은 "일본군의 저항 개시일이 2월 28일로 3*1절 하루 전날로 알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그날 사망한 자들을 포함해서 지난 3년간 무려 218명이 사망했다.
2024년 6월 7일, 일본의 다케우치 야스토 선생이 광주광역시 시민소통실에서 해당 사건에 대한 전말을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하였다. 그는 일본의 사학자이자 30년 넘게 강제노동자의 연구 및 본 사건을 계속 추적해 온 인물이다. 218명의 이름과 자세한 주소 및 관련 기록을 모두 찾아낸 상황.
"80년 가까이 막내 삼촌의 생사를 몰라 사망신고조차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사망사실을 알려준 일본인 연구자가 너무 고맙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밀리환초 사건으로 학살 된 고 김기만 씨의 유족 김귀남씨(86)는 이때 다케우치 야스토 씨를 만나 이렇게 말하였다. 이 일본인 연구자가 고인이 숨진 지 79년만에 유족들에게 사망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5남매 중 막내였던 삼촌이 일제에 차출돼 끌려갓지만 가족들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막내삼촌이 일제에 강제징용당한지 1년만에 편지가 와서 끌려간 곳이 마샬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편지는 2년동안 2차례왔고 그 뒤 생사를 알 수 없었다. 90세 작고하신 할머니는 생전에 막내삼촌이 남양군도가 살기좋아서 거기에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사망신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34년동안 밀리환초 학살사건을 연구해 온 다케우치씨는 이날 희생자 유족을 만나 밀리환초 저항의 주축은 전남 담양의 처연들이였다고 설명하였다. "밀리환초 희생자 대부분이 20대 청년이어서 자식이 없고 형제자매가 대부분 작고해 강제징용 진상을 밝히기 어려웠다. 유족들이 희생자 사망 사실조차 통보받지 못하는 상황에 놀랐다. 유족과 첫 만남은 밀리환초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를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