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9. 22:49ㆍ그날의 이야기
1946년은 한반도에서 남북 분단의 기초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미군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정책과 각 지역 주요 정치적 공작이 만발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속에서 남과 북의 정치적*군사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당시 미군이 한반도를 통치하면서 미군은 공산주의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 군사적 안정성을 확보할 필요에 의해 남조선국방경비대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을 창설하였으며, 이는 1개연대규모로 미군정하에 창설하였으며 대한민국 군군의 모체가 된다. 이후 대한민국 국방력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첫걸음을 하였다. 한국전쟁을 대비한 방어체계를 갖추어 남한의 독립적인 군사력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북쪽에서는 소련의 지원아래 김일성 중심의 공산주의 정부가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창설되면서 북조선의 행정적 체계가 본격적으로 구축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의 중앙정부 역할을 하였으며,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바뀐다.
3월20일, 서울에서 미군과 소련은 한반도에서의 신탁통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대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다 한반도에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의 안정을 도모하는것을 목표로 하였다. 미군과 소련은 각각 남한과 북한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두 강대국의 협력없이는 한반도 통일정부수립이 어려운 상황이였다. 하지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의 정치 세력 간 극심한 의견차이로 인해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신탁통치와 통일정부 수립 논의가 실패하고, 남북한의 분단을 가속하는 계기만 되었다. 또한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 내 정치세력의 참여문제로 인해 난항도 겪었다. 특히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간의 갈등이 커지면서 회의는 아예 결렬되고 만다. 그래서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는 더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중단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반도는 정부수립을 통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각기 다른 정치적 이념을 가진 두 세력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는 결국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6월3일 전북 정읍에서 한 연설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남북 분단의 위기가 점점 심화되던 상황에서 남한만의 독자적인 정부수립을 강조한 것이였다. 결국 남북 분단을 공식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성모병원에 입원중이였다. 김구의 제자인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정치자금으로 3백만원을 건냈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쓰겠다고 말하며 극구 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