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3. 19:04ㆍ그날의 이야기
광복 후 한반도는 미소 냉전의 전장이 되어 남북의 이념적 대립이 심했다. 특히 1947년 제주도에서는 남로당의 영향력이 컸으며, 미군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강했다. 제주도민들은 남한 단독 정부수립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반대했다. 이로인해 제주도에서 단독정부 반대시위와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1947년3월1일, 제주도에서 391절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 북국민학교의 행사가 끝나자 군중들이 가두시위에 나선다. 가두시위 중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다쳤는데, 이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때 주민 6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3*1사건'이 시작되었다.
'3*1사건'에 항의하여 3월10일부터 민관합동 총파업이 시작된다. 이때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섬'으로 지목했다. 이로써 본토에서 지원경찰대가 대거 파견되었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도 제주에 들어와 경찰 및 행정기관, 교육기관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았고 이로써 '4*3사건'이 발발한다.
1948년4월3일 새벽2시, 한라산 기슭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350명의 무장대. 이들은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이후, 5*10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은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4월28일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하게된다. 그러나 4일 뒤, 우익청년단이 제주 오라리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사건'이 벌어지고, 미군도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진다. 경찰은 오라리마을에서 우익청년단이 벌인 방화사건을 무장대의 방화로 꾸며 몰아가고, 미군정도 평화적 해결대신 무력 강경진압으로 선회한다.
이에 무장대는 5*10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일단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고, 5*10총선거에서 제주도 2개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된다. 그러자 미군정은 이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해하는 불순세력의 음모로 판단하고, 미군을 파견해 무리한 검거작전을 감행하며 6*23재선거를 시도하였으나 그마저도 실패하자 결국 제주도에 대한 강경 토벌작선이 실시되어 제주도민들이 집단 희생된다.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고, 대대적인 강경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10월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에서 5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된다. 이때부터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하기 시작한다.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후 대대적인 강경진압이 시작되었고,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은 물론, 폭도라 지목된 것만으로도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에 보복으로 무장대들은 해안마을 습격하여 경찰가족과 우익인사들을 살해했다. 이 와중에 무고한 주민들도 상당수 희생되었다. 이렇게 복수는 복수를 낳았고 그 사이 애먼 주민들만 죽어나갔다. 결국 1949년3월,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선무공작이 전개되어 한라산에 피신해있던 1만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하산했다. 그러나 선무공작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이 중 1600여명이 총살당했으며, 대부분은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5월10일 재선거가 치러졌고, 6월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와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들이 또다시 희생되었다.
이처럼 기나긴 수나의 세월을 보낸 뒤, 1954년9월21일, 드디어 한라산 금지구역이 전면 개방되었고, 약 3만여명의 제주 주민들이 희생된 제주4*3사건은 7년7개월만에 막을 내렸다...세계적인 냉전상황과 한반도 분단직전 고착화 과정에서 발발한 제주4*3사건은 공권력에 의한 집단희생이였다. 2000년대 이후 진상조사가 본격화 되었으며,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공권력을 대표하여 공식사과를 하였으며, 여전히 명예회복을 위한 상생의 해결과정을 밟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