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YH사건";가발보다 소중한 권리! 절규에서 혁명으로, 박정희정권의 균열/그리고 여성노동자들과 김영삼.

2025. 4. 1. 23:02그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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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무역은 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가발 수출기업이였다. 직원수 3천여명 그리고 당시 국내 15위의 대기업이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였다. 이들은 지방에서 올라와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어 고향집에 송금하는 것이 일상이였다. 한 마디로 각자가 한 집안의 살림목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국내 굴지의 대기업 YH무역에서 갑자기 폐업을 선언한다. 심지어 노동자들에게 그동안 일한 것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없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단 하루만에 느닺없이 일자리와 생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1979년 여름, 서울의 정치권 한복판에서 노동자들의 외침이 터져나온다. "살게 해주세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존을 지키기위해 거리로 나섰고, 결국 단순한 한 기업의 폐업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8월9일, 노동자 170여명이 당시 야당 총재가 있던 신민당 당사로 들어간다. "우리를 도와달라." 며 절박하게 호소하였다.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한참을 고민한다. 그러다가 고요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수화기를 들어 말한다. "들여보내..." 신민당 지도부는 이들을 보호하며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오른쪽 김경숙 열사

8월11일 새벽! 무장한 경찰병력이 갑자기 신민당사에 투입된다. 그리고 경찰들은 여성 노동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곤봉과 방패로 다스리며 진압했다. 그 안에서는 비명과 울음이 가득했다. 당시 경찰병력의 무차별적 폭력으로 인해 '김경숙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YH사건'이 수면위로 오르며 대한민국 역사상 지울 수 없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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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사건'은 단순한 노동투쟁이 아니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영삼 총재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고, 결국 박정희 정권은 국회에서 김영삼을 제명한다. 결국 이에 반발한 국민들의 분노가 커졌다! 이후 10월 '부마항쟁'이 발생하였으며, 부산과 마산에서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단 몇 주 뒤인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피격사건이 발생한다...

부마 민주항쟁

'YH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더이상 침묵하지 않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사회가 노동문제를 단순한 기업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해다. 아울러 이 사건은 여성 노동자들이 역사의 중심에 있던 드문 사례로 기록되었다.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보여준 용기 덕분에 한국 사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노동운동을 단순한 '옛날 이야기'로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또 다른 YH노동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회를 또 다른 한 페이지로 넘기며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생각한다. 특히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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