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이야기(44)
-
(1727년)정미환국~보복의도가 너무 지나쳐 버림받은 노론 그리고 환국으로 다시 정계를 잡은 소론. 그러나 '이인좌의 난'과 계속된 역모로 기세를 펴지 못하였다. 탕평책도 소용없구나 ~
영조는 즉위하면서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송인명*조문명 등의 말을 들어 탕평책을 펴나간다. 그래서 을사환국으로 정국을 소론에서 노론으로 물갈이 했던 영조. 노론이 정권을 잡자 노론은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고집하였다. 탕평책을 바랬던 영조는 적당히 해야지 너무 보복에 치우쳐 대사를 그르치면 안된다며 일단 타이르고 본다. 이미 죽은 조태구, 최석항의 관작을 추탈하고 유봉휘를 유배했으며 이광좌와 조태억을 삭출하는 선에서 끝내야지, 노론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토적(역적토벌)을 외치며 영조를 질리게 하였다. 이에 영조는 탕평을 위해 노론 탕평파를 선택한다. 노론 홍치중을 정승자리에 앉히고 정호를 영의정에 명하고 대신 좌의정 민진원과 우의정 이관명을 사직한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노론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하기..
2024.03.23 -
(1725년)영조의 탕평책;을사환국을 계기로 소론에서 노론으로 물갈이하고, 탕평책을 펴서 차별을 없애다. 임인옥사,을사처분,탕평채,탕평비,탕탕평평실,노론소론,붕당.
영조가 왕위에 올라 즉위한지 1년차. 정국은 경종때부터 여전히 소론이 주도하고 있었다. 경종때에 겪었던 신임옥사로 화를 입었던 노론들은 영조가 즉위하자 자신들에게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영조는 경종의 뒤를 이어 삼정승에 소론들로 구성하였다. 그런 한편, 노론의 영수격인 민진원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이것은 노론의 재진출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경종 국상 직후 1724년 11월, 이의연이 상소를 올리면서 소론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시작되고, 이후 이봉명을 비롯해 노론 인사들의 소론에 대한 공격상소가 계속된다. 영조는 일단 소론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이의현을 절도에 멀리 귀양보내고 소론을 대표하는 인물 김일경도 삭직하였다. 이의연과 김일경을 같이 처벌한 것은 영조가 탕평을 취하기 위한 정치운영술인 양치양해를..
2024.03.22 -
(1721년)신축환국 발생(삼사의변);경종,허수아비 왕? 그는 대의를 이루고자 이복동생을 품은 크고 위대한 왕이였다. 임인옥사,노론소론,당파싸움,조태구,대리청정,연잉군(영조),노론탄핵.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이윤. 1720년 이윤 경종(조선20대왕)이 즉위한다. 그가 재위하는 기간은 노론과 소론 당쟁의 절정기였다. 참고로 경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며, 병약하였다. 경종의 나이 34세. 아직도 슬하에 자녀가 없자 노론측에서 후사가 없으므로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압박한다. 어쩔수없이 28살의 연잉군을 왕세자로 삼는다. 이에 1721년 노론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요구하고 경종은 또 할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에 못마땅했는지, 소론에서 노론을 상대로 왕권능멸이라 하며 이를 결사반대하자 노론도 아차! 싶었는지 다시 대리청정을 거두어달라고 한다. 어쨋든 경종은 이에 관해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지쳤는지 귀찮게 하지 말고 자신을 그냥 냅두라고 한다. [임금이 수답..
2024.03.20 -
(1712년)백두산 정계비;조선과 청나라의 국경문제. 토문강이 두만강이 될 수도 있는 너희들의 혀가 놀랍구나! 토문,대동여지도,간도협약, 간도는
백두산 정계비는 1712년(숙종38년)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세워진 국경 경계비이다. 우리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통해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그대로 믿고 살아왔다. 하지만 18~19세기 외국에서 건너온 동아시아지도와 대동여지도를 비교해보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선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김정호가 조선의 영토를 그린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것은 기록에만 존재할 뿐 실제 확인된 바 없으며,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대동여지도가 실제 김정호가 제작한 그 지도가 맞는지 확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와 청나라의 입장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그려져 있다. 백두산 정계비 내용을 보면, [서쪽은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고,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삼으므로 분수령 위..
2024.03.18 -
(1694년)갑술환국;본처를 쫓아내고 애첩을 앉혀놓은 숙종. 또 후회가 되는지 다시 판을 뒤엎어버린다! 장희빈, 숙빈최씨, 복귀한 인현왕후, 노론과 소론, 남인세력의 몰락, 장희빈 사약.
기사환국 당시 본처 인현왕후를 궁에서 쫓아내고 애첩 장희빈을 왕비에 올려놓은 숙종. 조선왕조실록에서 유일하게 "미색이 뛰어나다"라고 기록되었을 만큼 장희빈의 미색이 엄청나긴 했었나보다~ 그래서 과감하게 환국을 일으키며 본처까지 쫓아내고 그 자리에 올려놓을 만큼 숙종의 눈이 돌아버렸겠지... 어쨋든 궁내 안방을 차지하게 된 장옥정. 그녀는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뒤에는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남이들이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다. 궁에서 쫓겨난 인현왕후는 폐비의 절차도 없이 일반 평민들처럼 소보교를 타고 궁을 나섰으며 그녀를 뒤따르는 인물도 상궁 한사람과 시녀 두어명 뿐이였다고 한다. 그래도 한때는 국모였는데, 이 얼마나 초라한 광경인가... 그렇게 쫓겨난 인현왕후 민씨는 친정인 안국동..
2024.03.16 -
(1689년)기사환국;숙종♡장옥정.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실권을 잡은 사건. 숙종의 카리스마! 인현왕후, 장희빈(장옥정), 송시열, 김만
1680년 경신환국 후 서인세력이 집권한다. 숙종이 등극하고 6년만에 경신환국으로 남인세력이 몰락하고 서인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 숙종이 남인출신의 궁인 장씨(희빈 장씨)를 총애하자 어머니 명성왕후가 이를 경계하여 1680년 장씨를 궁궐밖으로 내쫓았다. 그로부터 1년 후 1681년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사망하고 이에 명성왕후와 송시열의 추천으로 인현왕후(여흥 민씨)가 왕비로 선출되는데 가례 초기부터 숙종은 애정은 커녕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당시 국제정세로는 중국에서 오삼계의 난이 일어났는데 청이 난을 진압하였고, 중국국내의 반청세력이 일소되어 강희제에 의한 군주독재가 이루어진다. 청의 '오삼계의 난' 진압 이후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잠잠해졌다. 1683년 숙종이 기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었..
2024.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