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이야기(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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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년)"측우기"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세자 문종의 획기적인 아이디어~ 유럽보다 200년이나 앞선 기술력! 역시 천재다!
벼농사 중심이였던 조선시대에서 "비"는 생존과 직결될 정도로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날씨 및 기후를 기록하였는데, 무지개와 우박, 빗물의 양까지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측우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우택법"이라 하여, 땅 속에 스며든 빗물의 양을 호미나 쟁기로 파서 얼마나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측정하였다. 각 도의 감사가 강우량을 집계하여 보고하면, 호조에서는 이것을 정기적으로 집계하여 기록하였다. 그런데 우택법은 땅이 건조하지 습한지에 따라 빗물의 스며드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어 각 지역마다 강우량 비교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위해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는 좀 더 합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이런 우택법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1441년에 '측우기'가 발명되었다. 측우기는 원..
2024.01.03 -
(1434년)양부일구와 자격루;정확한 시간이 없던 시절,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결실이 빛을 보다! 해시계, 물시계, 양부일구 시계, 강윤*강건 형
오늘날은 정확한 시간을 바탕으로 1분 1초를 다투며 살아간다. 하지만 옛 사람들은 천체에 의지하며 시간을 측정(?)하며 살아갔다. 대부분 농경에 종사했던 시절이라 시간 측정도 자연에 의지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시간의 흐름을 파악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자연 현상에 의거하여 파악한 시간은 제각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정확한 표준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제반조치를 시행하였는데 이때 장영실의 공이 엄청났다. 양부일구와 자격루는 각각 '해시계'와 '물시계'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을 발명한 장영실은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다. 비록 신분이 미천(노비)하였지만 세종대왕께선 인재를 알아보시고 반대세력의 농간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무척이나 아끼셨다. 장영실, 조선 ..
2024.01.02 -
(1429년)"농사직설" 편찬;세종대왕께서 정초와 변효문에게 명을 내려 발행하였다. 이앙법, 직파법, 최초 농법서, 농사책, 농가집성 등.
조선시대엔 중국의 농업상식을 기반으로 조선팔도에서 농업기술이 적용되어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농업기술은 최고였지만 농업이란 모름지기 땅의 상태와 기후에 따라 적용 및 방식이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농법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나라의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현장조사에 의한 결과물이 필요했다. 조선 태종이 중국에서 번역된 농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농법을 전하였다면, 세종대왕은 중국의 기후와 풍토가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고, 정초와 변효문에게 명하여 우리 풍토에 따른 농법의 차이를 고려하여 조선 팔도를 전수조사하고, 농부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를 간행하라고 지시하였다. 내용은 비곡(종자의 선택과 저장, 처리), 지경(논밭갈이), 종마(..
2023.12.30 -
이종무의 '대마도정벌';'독도'는 한국땅! '대마도'도 한국땅! 흔일강리역대국도지도,세종대왕,주원장,선제정벌,대마도주 등.
고려말에서 조선초기, 끄덕하면 왜구의 대한 침략이 일어나기에 매우 큰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세종대왕은 대규모 원정함대를 구성하고 왜구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한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 49.6km이며 일본 후쿠오카에서 134km 떨어진 곳으로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가까운 일본 섬이다. 당시 배경을 살펴보면, 왜구가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에도 간간히 침략을 일삼았는데, 이에 명나라의 홍무제는 왜구에 대한 방어책으로 해금정책을 시행하여 외국과의 교역 및 해외 도항을 금한다. 결국 약탈과 사무역에 의존한 쓰시마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명나라 실권자였던 주원장은 이들 왜구세력이 반대파와 결탁할 것을 우려하여 조선에 건의를 한다. "우리가 병선 1만척을 내어 토벌에 ..
2023.12.29 -
(1394년)한양천도;서울이 조선의 수도가 되었던 배경. 무학대사와 이성계, 경복궁, 왕십리.
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다. 그리고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다. 처음 조선을 건국할 당시 기존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은 아직 이성계를 반대하는 전통세력의 기반이 강했다. 또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던 이성계는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는데, 기존 개경의 기운이 쇠하였으니 무학대사를 통해 알아본 지금의 도읍지(한양)가 최고의 명당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무튼 도읍을 한양(서울)으로 옮기면서 기존 개성에서 자리잡고 있던 귀족들이 한양으로 넘어 오면서 개경의 기반은 약해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왕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한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가운데 한강이 흐르고 있으며, 산이 있고 물이 풍족하다 보니 적을 방어하는데 유리하다고 판..
2023.12.25 -
(1401년)신문고(申聞鼓);최초 신문고,국민신문고,고발제도,국민청원제도,국민제안홈페이지.
현대엔 국민청원제도로써 '국민신문고'가 있다. 국민신문고는 상소, 고발 제도의 보완책으로써, 개인 및 단체가 직접 억울하거나 피해사실에 대한 사연을 고발하고 처리를 청원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국민신문고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사실 한국 역사상 아주 오래전부터 '신문고'라는 제도가 법제화되어 시행되고 있었다. 신문고는 중국송나라에서 처음 시행했던 제도로써, 북을 백성이 두드리면 임금이 직접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고 처리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태종2년(1401년)에 송나라의 법을 본받아 특수청원 및 상소를 위하여 대궐 밖 다락집에 '신문고'라는 북을 달았다. 당시에도 법제화되어 있었는데 신문고는 여러 단계 이후 최후의 항고시설로써 임금 직속 의금부 당직청에서 주관하였고, 임금이 직접 듣고 처리하였다. ..
2023.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