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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24. 10:28잡다한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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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인디언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동양의 인도의 일부로 착각하여 원주민을 인디오(에스파냐어로 '인도인'이라는 뜻)라고 불렀는데, 뒤에 본랜의 인도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아메리카의 인도인' 즉 아메리칸인디언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메린드(Amerind) 또는 아메린디언(Amerindian)이라고도 한다. 단순 말로 아메리카 인디언이지,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합친 넓이는 아시아대륙과 비슷한 크기로써, 그들은 단순히 단일 민족은 아니다. 즉 아시아인이란 용어 안에 서로 완전히 다른 여러 민족이 포함되는 것처럼 굉장히 범위가 넓은 용어로써, 특히 중남미의 멕시코나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일대는 아메리카판 비옥한 초승달지대라고 할 만큼 무수한 국가들이 생겨나고 대립했던 다양성이 있다. 즉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유럽인 등과 대등한 다양한 민족 집단의 총체를 의미한다. 다만 인종적으로 크게 다른 북극권 원주민들은 아메리카 인디언 부류에 넣지 않는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수, 샤이엔, 아파치, 크로, 나바호, 코만치 등 어느 부족을 막론하고 하나의 원칙이 있다. 우선 그들은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그들 부족은 한 지역의 사냥감이 떨어졌다 싶으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 사냥감이 다시 깃들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그들은 자연에서 먹을 것을 취하되, 자연을 고갈시키지 않았다. 

 

아메리칸인디언 타코타족 소녀

 

그들의 가치체계에서 개인주의는 자랑거리라기보다는 웃음거리였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 인디언이 자동차를 구입하면 누구든 그것을 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산 사람도 으레 누구에게든 빌려 주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디언의 자녀들은 강제나 속박없이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며 자연스럽게 부족의 어엿한 일원으로 성장해 갔다. 

 

(참고)아메리칸 인디언의 "자녀교육 10계명"

1.꾸지람 속에서 자란 아이는 비난을 배운다.

2.적대감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싸움을 배운다.

3.놀림 속에서 자란 아이는 수줍음을 배운다.

4.수치심 속에서 자란 아이는 죄책감을 배운다.

5.관대함 속에 자란 아이는 인내심을 배운다.

6.격려 속에 자란 아이는 자신감을 배운다.

7.칭찬받고 자란 아이는 감사함을 배운다.

8.공평함 속에 자란 아이는 정의를 배운다.

9.안정감 속에 자란 아이는 신념을 배운다.

10.인정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

 

인디언들은 접목 교잡법을 터득하여 옥수수같은 작물의 잡종을 만드는데 이용하였고, 파라고무나무의 수액을 이용해 방수포를 만들었으며, 유럽의 면직물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결이 고운 무명옷을 지을 줄 알았고, 아스피린(아세틸살리실산)이며 키니네 등의 효험을 익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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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에는 세습 및 항구적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결정이 이루어질 때마다, 각자 파우와우(부족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개진하였다. 파우와우는 유럽의 공화제 혁명보다 훨씬 앞서서 이루어진 의회제도였다. 만일 부족 구성원의 다수가 추장을 신뢰하지 않으면 추장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인디언 사회는 평등한 사회였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야만 그는 추장이 될 수 있었고, 지도자가 되는 것은 신뢰의 문제였다. 그리고 파우와우에서 어떤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 아니였다. 자기가 그 결정에 찬성투표를 했을 때에만 그것을 따를 의무가 있었다. 곧, 부족회의는 남에게 자기 의견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자기가 하려는 행동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장치였다. 

 

한창 번영을 누리던 시절 직업적인 군대를 보유한 적이 없었다. 필요할 경우에는 모두가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그들은 전사이기 전에 먼저 사냥꾼이자 경작자 그리고 한 가정의 부모였다. 그들은 '생명'이란 마땅히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적의 목숨도 함부로 해치지 않았다. '역지사지'의 태도를 늘 견지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전쟁은 자기의 용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경기였지 적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행위가 아니였다. 어느 편에서든 피를 흘리는 사람이 생기면 전투는 즉각 중단되었고, 사망자가 생기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그런 문화속에 살던 그들이 유럽인들의 전쟁방식을 이해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노인과 부녀자와 아이까지 죽이는 백인들을 보고 그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무서운 정도가 아니라, 몰상식하고 비논리적이여서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남아메리카 인디언들보다 비교적 오랫동안 백인들의 침략에 저항했다.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남아메리카 쪽이 공격하기가 훨 용이했다. 남아메리칸 인디오 사회는 우두머리의 목만 자르면 사회 전체가 붕괴되어 버렸다. 그것은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행정이 중앙에 집중된 사회 체제의 큰 약점이었다. 그런 사회는 군주 하나에 의해 사회 전체의 운명이 좌우되기 십상이다. 북아메리칸 인디언 사회는 남아메리카 쪽보다는 더 분산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백인 카우보이들은 이리저리 이동하는 수백의 부족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의 목표는 한 곳에 붙박여 있는 왕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수백의 우두머리였다. 150명으로 이루어진 한 부족을 겨우 굴복시키거나 몰살시키고 나면, 다시 150명으로 이루어진 또다른 부족을 공격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의 대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던 1492년 아메리칸 인디언 수는 1천만이어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1890년에 인디언 인구는 15만으로 줄었고, 그들 중의 다수는 유럽인들이 옮겨온 '질병'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1876년 6월 25일 '리틀 빅 혼' 전투는 전례없이 많은 인디언들이 집결해서 싸운 드문 경우였다. 1만~1만2000명에 달하는 인디언들이 함께 모였고, 그 중에 전사는 3~4천명을 헤아렸다. 인디언들은 커스터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좁은 땅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승리를 거둔 후에 다시 흩어졌다. 그들은 백인들이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다시는 자기들을 깔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순진~)

 

그러나 인디언 부족들은 백인들에게 차례차례 정복되었다. 1900년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부는 그들을 몰살하려고 했다. 그 후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이 흑인이나 치카노(멕시코 계 미국인), 아일랜드 인, 이탈리아 인들처럼 미국이라는 <멜팅포트>에 통합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견의 소치였다. 인디언들은 자기들이 서양의 정치 사회 체제에서 무언가 배울 수 있다고 생각치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체제가 백인들의 것보다 더 진보되었다고 믿었다. 

 

리틀 빅 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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