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3. 15:04ㆍ그날의 이야기
사림파는 고려시대에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당파로써, 이들은 고려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활동하며 사회, 정치 및 문화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림파 분열의 원인은 다양한 사건이 있는데, 내부에서의 갈등이나 외부 요인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 16세기 선조대에는 사림파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파벌이 갈려서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하게 된다.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을 누가 맡을 것이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퉜고, 척신을 두고 어떻게 청산할것인지에 대해 동인과 서인의 의견충돌도 있었다. 이황의 뒤를 계승한 동인은 강경론을 외쳤고, 이이를 계승한 서인은 온건론을 펼쳤다. 결국 사고방식이 맞는 자들끼리 학연,지연,지역 등으로 뭉치게 된다.
더군다나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된다. 동인출신인 정여립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대동계를 조직하였는데, 나중엔 그 대동계가 역모의 오해를 뒤집어 쓰게 되었고, 이때 많은 동인들이 축출되었다. 이때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고, 조정 내부의 붕당도 점점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후, 왕위자리 계승 문제로 왕세자를 정하던 일에 있어서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정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이로 인해 선조의 미움을 사고 유배령이 떨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서인이 파직되었고, 이황 계열 동인들은 온건한 입장을 취한 덕분에 운좋게도 숙청을 피해갔고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처음에는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는 듯 하더니,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자 광해군 라인인 북인이 정권을 장악한다. 그 후, 광해군은 대동법실시로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고, 인목대비 폐위와 영창대군 살해로 폐위된다. 이때 서인이 '인조반정'을 주도하였는데 남인도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고, 북인은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폐위*북인 퇴출되고, 서인과 남인만 조정에 남게 된다.
이제 서인과 남인만 남게된 조정. 이때부터 불타는 예송논쟁이 시작된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죽었을 때 '상복'을 두고 벌어졌다.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되는지를 두고 시작된다.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니 1년 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왕이 사대부와 같을 수 없으므로 장남에 준 해 3년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15년 후, 효종의 아내가 죽고 또 자의대비가 몇 년 상복을 입어야 되는지 따지며 2차 예송논쟁이 발생한다. 서인은 이번에도 원칙대로 가자며 9개월을 주장했고, 남인은 1년을 주장했다. 현종은 이번엔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이로써 2차 예송논쟁의 승리는 남인이 되고 정권도 남인에게 넘어간다.
이렇게 16세기 예송논쟁까지를 붕당정치라고 한다. 뜻 맞는 벗끼리 당을 형성했다는 뜻이다. 붕당의 핵심은 '공존'이다. 하지만 권력투쟁을 해도 완전히 '너 죽고 나 살자' 식은 아니였다.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여당에 올랐다면, 서인은 야당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계속 다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