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4. 21:52ㆍ그날의 이야기
한사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을 일컬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 한다. 먼저 이순신장군의 주요해전을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도대첩~부산포해전~명량대첩~노량해전 이다. 1592년 가장 먼저 이순신 장군의 첫번째 대첩 한산도대첩이 일어난다.
한산도대첩
한산도대첩은 견내량 대첩 or 한산 대첩으로 불리기도 하며 살수대첩(을지문덕), 귀주대첩(강감찬)과 함께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3대 대첩이라 불린다. 경남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께서 학익진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펼친 전투다. '학익진'이란 원래 육상전에서 쓰던 진법인데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태를 취하고 적을 포위하듯 압박해 진격하는 진법이라서 학익진이라 불린다.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은 판옥선을 이용하여 거짓 후퇴로 적선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고 학익진 전술을 펼쳐 적을 섬멸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임진왜란 전세가 크게 바뀌게 된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함은 물론 조선군의 사기를 진작시켜주었다.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한산도대첩을 두고 '이 전투 한번으로 전쟁의 형세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고 평할 만큼 대단한 해전이랄 수 있다.
1차 진주대첩
조선 수군에게 크게 패한 왜군은 바닷길을 통한 병력수송과 물자보급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육지를 통해 전라도를 장악할 목적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한다. 1592년 10월, 3만병력의 왜군이 총공격을 가해왔다. 이들은 조총을 쏘면서 맹렬히 공격해 왔는데, 당시 진주 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수천명의 조선군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성을 방어하였다. 적의 조총에 맞서기 위해 활과 총통은 물론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이용해 결사적으로 맞섰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기와와 돌, 초가지분, 나무 등이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였다.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난다. 당시 진주 목사 김시민은 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진주성의 패배로 왜군은 더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하였고, 군량보급문제로 더욱 고통받게 되었으며, 유성룡은 진주대첩을 두고 '그동안은 성주들이 성을 사지로 여겼으나, 진주에서의 승리 이후 성주들 스스로 성을 지키려는 의지가 생겨났다' 면서 높게 평가하였다.
행주대첩
1593년 2월, 왜군 3만병력이 행주산성을 포위한다. 권율 장군과 조선군 1만병력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성벽을 정비하고, 특수무기 제작도 하였으며, 백성들도 합심하여 맞서 싸웠는데 이때 부녀자들도 있었다. 당시 명의 참전으로 평양성에서도 밀려난 왜군은 점점 수세에 몰리게 되었으나, 벽제관에서 명군을 패퇴시킨 이후 명군은 소극적인 대응을 보이고 있었다. 왜군은 이때를 기회다 싶어, 다시 전세를 뒤집고자 행주에 있는 조선군을 몰살시키기 위해 3만의 대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포위한 후 여러차례에 걸쳐 공격을 하였으나, 권율장군의 뛰어난 지휘력과 다양한 화약무기의 콜라보와 부녀자들의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든 행주치마로 돌을 담아 날라 투석전을 도우며 결국 조선군이 승리하게 된다.
2차 진주대첩
1593년 6월 왜군 7만의 대규모 병력이 다시 진주성으로 쳐들어 온다. 이때도 조선군은 수천에 불과하였고 역시 백성들이 함께하며 치열하게 맞섰다. 하지만 숫적으로 너무 열세였던 터라, 결국 9일만에 함락되고 조선군 병사와 백성들이 거의 다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왜군도 크게 타격을 입은 터라 더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동남부 거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