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5. 20:21ㆍ그날의 이야기
정유재란이란 정유년에 일어난 난을 의미하며, 왜구가 다시 재침략한 전쟁이다. 당시 휴전이란 개념은 딱히 없었지만, 당시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강화협상 중 서로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여 파토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 등이 본토의 예비대인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침략한게 정유년이였다. 본래 임진왜란의 일부 스토리이긴 하나, 이순신 영화 "명량"을 보면 그 내용이 잠깐 나오는데, 원균이 칠천량에서 수군을 다 말아먹어서 정유년에 전라도가 왜군 손에 떨어진다. 그래서 규모가 커져 별도로 "정유재란"이라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속에서 결국 조정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재기용한다. 이후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고작 12척의 함선으로 서해 진출로인 명량(울돌목)의 지형조건과 조류를 활용하여 왜선 133척을 파괴하고 대승을 거둔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은 철수하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도 철군하려 하였지만 이순신의 수군과 명 도독 진린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고, 이에 고니시는 명 도독 진린에게 뇌물을 주며 협상하였고, 결국 왜선 몇 대가 시마즈 야스히로에게 가게 되었고 다시 500여척의 왜선이 노량에 진입하게 된다.
노량에서 적 500여척을 마주한 이순신. 그의 군대는 200여척에 불과하였지만 4시간의 전투 끝에 왜선 350여척을 파괴하고 승기를 잡는다. 남은 왜선들은 도주하느라 분주하였지만, 이순신은 이 전쟁을 확실히 끝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추격한다. 그리하여 조선 군사들은 왜선 100여척을 나포하였고, 한편 왜교성에 갇혀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퇴각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에서 끝까지 추격하다 왜군의 총탄에 맞고 전사한다.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끝이 난다.
정유재란은 1592년~1598년까지 일어난 한일전쟁이며, 이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으며, 정치*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정유재란 시기에 일본군은 함평에서 이백여명의 조선인을 살해하였으며, 수많은 문화재와 유산을 파괴하고 강탈해갔다. 또한 도자기 장인을 비롯한 수많은 장인들은 물론 여성들까지 수많은 백성들이 끌려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인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으면서, 그 인원수를 체크하기 위해 코를 베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 교토에는 '귀무덤'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당시 국제정세로서는 북쪽 유목국가인 후금이 세워지고 명나라를 정복해 대청제국이 되었으며, 훗날 조선도 후금에게 침략을 당해 굴욕적인 패배를 맞보게 된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몰아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며 에도 막부 시대가 시작된다.
정유재란은 조선의 국방능력의 한계와 민족적자각의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훗날 국방강화를 위한 노력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현재도 정유재란은 한일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일본 정치인들이 정유재란의 사실여부를 부정하거나, 과거 일본 위안부 문제 등과 관련하여 여전히 계속 갈등을 빚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