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이야기(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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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만민공동회 개최, 최초의 독립신문;서재필박사 귀국,최초의 한글신문,전제군주제(고종)VS입헌군주제,절영도의 조차 반대, 오늘날 만민공동회_촛불집회 등.
갑신정변에 가담한 죄로 역적으로 몰리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망명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된 노동일을 하는 서재필. 이곳에서 우연히 한 미국인 독지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게 되며 심지어 조지 워싱턴 의대에 합격하여 의사가 된다. 그러면서 미국 시민권도 취득~ 또 조선으로 돌아오기 1년 전에는 미국인 아내와 결혼도 한다. 이 당시 서재필은 지금이야말로 조선이 개혁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귀국을 한다. 미국에서 매스컴 영향력을 겪었던 그는 조선에 와서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이때가 1896년 4월 7일. 현재 '신문의 날'이기도 하다. 서재필은 정부에 독립신문 창간 준비금과 가옥 구매비를 요구하고 제공받았는데, 그 돈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인쇄기를 들여오고, 서울 정동의 한 가옥을 사서 그곳을 독..
2024.07.19 -
(1895년)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아관파천,러일전쟁,국제사회에서 일본의 고립,대한제국 선포 등.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일본군과 친일 세력에 의해 명성황후(민비)가 시해된 사건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커졌고, 조선정부는 일본의 압력 아래에서 갑오개혁을 추진하며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개혁과정에서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한다. 결국 조선 내부에서 친일파와 친러파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고, 명성황후는 친러파를 지지하며 일본의 간섭에 저항하였다. 또 당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경제개혁은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일본의 경제적 착취가 더 심해졌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였다. 일본군과 낭인들은 건청궁에 침입해 ..
2024.07.16 -
(1886년)조선후기 육영공원&이화학당;양반자제 중심 육영공원, 여성선구자 중심 이화학당. 사회적 변화와 근대화 교육의 초석. 유관순의 숨결~
조선후기 개화기시기에 설립된 육영공원과 이화학당은 한국 근대교육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각각 다른 목적과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 조선의 교육개혁과 근대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조선정부는 서양문물과 지식을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육영공원을 설립하였는데, 주로 양반 자제들에게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교육하는것이 목적이였다. 서양의 과학, 기술, 언어(특히 영어) 그리고 서양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지식 등 꾀 넓은 범위의 지식을 교육하였다. 외국인 교사들이 초빙되었는데 주로 미국과 영국 출신 교사들이 많았다. 이렇듯 육영공원은 조선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도입한 기관이였으며, 한국의 근대교육의 시작을 알렸다. 많은 인재들이 육영공원에서 배출되었으며 조선의 근대화와 개혁에 많은 이들이 기여..
2024.07.13 -
(1885년)톈진조약, 한성조약, 영국의 거문도 불법점령;나날이 위축해지는 조선의 주권. 결국 국제 외교정세에서 조차 초라해지다...
19세기 후반엔 조선과 관련된 여러 조약과 사건들이 조선의 국제적 위치와 내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톈진조약은 갑신정변(1884년)이후 조선에서의 양국의 군사적 개입을 규제하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체결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가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을 근대화하려고 시도했지만 3일만에 끝나버리고,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내정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조정하기 위해 조약이 필요하였고 1885년 톄진조약이 체결된다. 톈진조약의 주요내용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한다. 만약 조선에 군대를 다시 파견할 경우 서로에게 미리 통보하고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2024.07.10 -
(1884년)갑신정변 일어남; 3일 천하로 끝난 근대개혁의 아쉬움 ~ 새로운 세상을 꿈 꾼 젊은 그들. 아~ 조선이여!
19세기 후반, 조선은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적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아울러 조선은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어야 했다. 또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도 더욱 심해졌다. 이는 조선의 주권을 약화시켰고, 이에 따라 개화파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개화파는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려 하였으며, 사상의 정도에 따라 이들은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나뉘게 된다. 급진개화파는 급격한 개혁을 주장했으며, 온건개화파는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하였다.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이 있다. 김옥균은 급진개화파 중심인물로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하려 하였다. 박영효도 급진개화파의 중요인물로써 일본에서 유학을 ..
2024.07.07 -
(1882년)조미수호조규 체결, 임오군란 발생;슈펠트제독의 노력,이홍장,조선최초의 사관학교 설립,민씨정권 몰락과 복귀,청의 내정간섭,제물포조약,군제개혁의 필요성 부각.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고 조선과 일본의 개항이 시작되었다. 이후 서구열강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는데, 당시 미국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조선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것 또한 강화도조약 못지 않게 불평등조약과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조선과 미국 간의 상호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사관을 설치한다. 조선은 미국과의 무역을 허용하고, 양국 상인들의 자유로운 교역을 보장했다. 미국인은 조선에서 미국 법률의 보호를 받으며 조선의 사법 관할권에서 벗어나되, 양국은 상호 공정한 관세를 부과하기로 하고 서로에게 최혜국 대우를 제공하기로 한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그리고 여기엔 1880년부터 조선과 청나라, 일본 3국을 오가며 순방외교..
2024.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