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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경신환국;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숙종의 카리스마. 맘에 안드는 것들 싹 다 바꿔버려 !
'환국'이란 정국이 전환되었다는 의미로써, 그 목적은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여당)이 왕을 결정하고, 왕은 붕당 간 경쟁을 이용하여 대신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약화시키기도 하며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이였다. 곧 왕권이 강했기에 정치를 주도하고 사대부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 배경이랄 수 있다. 환국이 현종 때부터 시작되기 하였으나 피의 정치보복이 정점에 달했던 것은 숙종 때라고 할 수 있다. 숙종 때부터 정치적 격변이 여섯 번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네 개를 주요 환국이라 부른다. 연도 순서대로 경신환국(숙종 6년, 1680년)~기사환국(숙종 15년, 1689년)~갑술환국(숙종 20년, 1694년)~정미환국(영조 3년, 1727년) 이다. 1674년, 현종이 병으로 급사하자 당시 13세에 불과하던..
2024.03.09 -
한국 화폐의 역사;최초의 화폐,건원중보,상평통보,흥선대원군,일제시대화폐,상평통보 5만원? 가상화폐.
화폐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구하기 위하여 물물교환 등을 하면서 가치가 인정되고 그렇게 경제적 교환수단이 되며, 상고시대부터 시대를 거치면서 조가비/납작한 돌/가축/쌀/철/동/은/금 등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는 고대 이전에 주로 물물교환 등 물품화폐가 교역수단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삼한시대에 철이 생산되면서 물품화폐로써 쌀이나 철이 주로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연금술이나 수공업기술이 발달하면서 금이나 은, 동의 유통량이 많아져 보편적인 돈의 역할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의 영향으로 각종 화폐가 유입되어 국내 일부 유통계에서는 대외무역 결제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고려시대에는 화폐가 유통될 만큼 사회경제기반이 성숙되지 않았고, 화폐공급도 원활하지 못하여 쌀이나 기..
2024.03.08 -
(1636년)병자호란 발생;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쳐들어 온 청나라. 인조의 굴욕 ~ 삼베구고두, 정축화약,삼전도비,환향녀,백두산정계비,우암 송시열.
정묘호란으로 강화조약을 맺고 돌아간 후금. 그들은 명나라의 드넓은 땅도 어느정도 빼앗고, 국호도 '청'나라로 바꾸고 명실공시 동북아의 최강국이 되었다. 강화조약으로 '형제관계'를 맺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강대함을 드러내놓고 싶었는지 이번엔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정묘호란을 겪어본 터라 조선 조정에서는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청나라에 끝까지 대항하자는 '주전론'과 청나라를 이기기는 어려울 듯 하니 그들의 요구에 따르자는 '주화론'이 대립한다. 결국 '주전론'으로 의견이 잡히고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한다. 이에 결국 청나라의 홍타이지는 침략을 결정하고 드디어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병자년에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난이 일어났다 하여 '병자호란'이라 일컫는다. 조선 조정은 변란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
2024.03.05 -
(1635년)영정법 실시;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니 세금이라도 줄여주자~ 1결당 4두!
장기간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인해 조선 국토가 황폐해져, 경작지의 면적인 왜란 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에는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해 일부 관리들의 부정으로 인하여 국가 수입이 크게 줄어들었고, 농민생활도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삶이 궁핍해진 백성들이 도적이 되곤 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도적이 '임꺽정'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수취제도를 개선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새로 농토를 개간하고, 버려진 농토에 다시 농사를 짓게 하여 경작지를 넓혀간다. 그리고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대장'을 새로 만들어 농경지 파악에 힘썼다. 조선 전기 세종대왕 시절엔 공법을 '연분9등법(풍흉기준)'과 '전분6등법(토지비옥도기준)'을 시행하였다. 쭉~ 이렇게 시행해오다가 인조때 '영정법..
2024.03.03 -
(1627년)정묘호란;후금(청나라)이 조선을 침공. 정묘호란 원인, 전쟁 과정, 정묘호란 결과, 강화조약 체결, 정묘호란 유적지, 연미정, 곡성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이 조선을 침공했다. 당시 국제정세로 보면,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 사이의 중립외교 정책을 펴며 후금과 별 탈없이 지내고 있었다. 또한 명나라와도 여전히 무난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죽은 후 중립외교정책은 무산되어 다시 오랜 우정의 관계인 명나라와의 관계만 유지하고, 후금과는 관계가 어긋나게 된다. 당시 후금은 명나라 정복을 노리고 있었는데 뒤에서 몰래 명을 지원하는 조선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결국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그 지원세력을 끊어버릴 목적으로 조선을 먼저 공격한다.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 시작! 1627년 1월 13일, 가장 먼저 의주 공격이 시작된다. 쳐들어 온 후금의 병력은 약 3만대군임에 비해 의주에 주둔해 있던 조선군은 약 3천명이였다..
2024.03.01 -
(1624년)이괄의 난;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이괄. 왜 그가 왕따였는지... 이러니까 눈 돌아가지~
1623년 서인세력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당시 이괄은 한성부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평소 불만이 있던 자들보다 자신이 한 등급 아래인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는데 그치고, 아울러 자신의 아들과 동생은 논공행상에서 아예 제외되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후금의 침략이 불안한 터라 조정은 그를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하고 관서지방으로 파견하였다. 1624년 이괄은 관서지방에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느닺없이 평소 정적이였던 문회*허통*이우 등이 자신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그러나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하였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한다. 안그래도 논공행상때부터 불만이 폭발할 지경인데 이런 어..
2024.02.29